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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의 성장지인 흑석동

by 김맛세오 posted Feb 17,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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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 평화. 선


  초교 4학년 무렵에 담뿍 어린시절의 정이 든 동지기(동작동)를 떠나 흑석동으로 우리 집은 이사를 하였다.  자연과 농촌의 순수한 시골스러움이 전부였던 동지기에 비하면 흑석동은 이미 상당히 많은 인구가 밀집된 지역이라, 서울의 변두리지만 소박함과는 거리가 먼 곳이었다.

  그래선지 10년의 세월을 흑석동에서 지냈으면서도 공부에 열중한 것 밖에는 솔직히 별다른 추억이 없다.  아마도 나대는 성격이 아니라서였는지, 가까이 오고간 초등학교 3년간과 노량진 전차역을 오간 6년간의 10여년동안 깊이 새겨진 추억거리가 별반 없다.

  있다면 성당에 다니시는 할머니를 따라, 세례를 받지 않았음에도 바늘과 실처럼 할머니의 꽁무니를 따라 성당엘 자주 간 것과, 학교 공부가 끝나 집에 돌아오기가 무섭게 만화방으로 쪼르르 달려가 연재 만화의 재미에 푹 빠져 울며 웃었던...


  그러면서도 오늘 흑석동을 주제로 이 글을 오리는 것은, 최근 초교 동창 녀석들 열댓명이 동작동에서 만나 현충원 내 지장사(옛 화장사)를 거처 흑석 3동으로 넘어가면서 '달마사' 옆길로 하여 '은로' 초교 를 지나며 느낀 바가 컸기 때문.  달마사 근방은 지역이 높은 곳이라, 흑석동에서도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살던 달동네였었다.  '은로'초교에서 조금만 더 올라가 고개를 넘으면 숭실대학교가 나오는데, 그 일대가 상전벽해처럼 전부 아파트 숲으로 변하여 옛 길 예 동리라는 아늑한 고향에 대한 이미지는 전혀 찾아 볼 수 없었다.  모교인 '은로'초교도 고층 아파트에 둘러쌓여 작은 섬처럼 초라해 보였다.  바로 곁 '중대부속 중학교'를 지나 조금만 가면 내가 살던 동리가 나오는데, 거기 역시 개인 및 빌라 집들을 전부 부수고 아파트를 지을 부지 조성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물론 내가 살던 기와 집 역시 꽤 오래 전에 3층 빌라로 변해 낱선 동네란 느낌 외에는 아무런 고향 내음도 나지 않았다.


            흑석3동 삐알 길을 내려오면서


            아슴아슴 떠오르는 옛 기억들...


            아득히 저 멀리 보이는

            변해도 너무 많이 변해버린 

            한강, 모래톱들마냥

            흐르고 묻혀버린 아득한 배냇 기억처럼...


            그래도 눈내리는 겨울은 오겠지?

            때가 되면 눈은 그렇게 녹을테고...


            그런데 맘 한 구석 왜 이리 허전할꼬?



  그동안 10년마다 돌아온 '안식년'을 두 번 지내는 동안, 운좋게 기회가 닿아 그때마다 예전에 공부하던 영국, 캔터베리를 간 적이 있었다.  그 동네가 제 2의 고향처럼 따스하게 느껴졌던 것은, 수십년 세월이 지났어도 옛 건물들은 물론 골목길이나 작은 빵 집...그 어느 것 하나도 변함이 없는 옛 모습 그대로여서 비록 아는 사람은 없어도 고향의 품 속에 안긴 것처럼 감회가 깊었다.

  마음 한 구석 고향이 자리해 있다는 것은 우리네 정서상 참으로 좋은 의지가지가 되는 것이다.


  물론 언젠가는 돌아가야 할 영원한 귀향이 우리네 예표가 되어야 하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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