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의 얘기는 이해하기 쉽지 않고
그래서 많이 생각해야 하고 깊은 이해를 필요로 합니다.
먼저 주님께서는 왜 이방인 지역인 티로에 가셨을까?
가서 이방 여인을 그렇게 모욕을 주실 거면 뭣 하러 가셨을까?
일부러 간 것이 아니라 그냥 간 것이거나 쉬러 가신 건데
이방 여인이 성가시게 찾아와 그래서 모욕적으로 답하신 걸까?
그리고 주님도 당대 유대인들처럼 이방인을 개 취급을 하셨을까?
사실 오늘 복음을 보면 주님께서 티로 지역에 가셨지만
어느 집에 들어가셔서 조용히 계시려 했고 알려지기를 원치 않은
당신 의도와 달리 결국 숨어계실 수가 없다는 식으로 얘기합니다.
그리고 같은 얘기를 전하고 있는 마태오복음은
티로 지방으로 물러나셨다고 표현하는 것을 볼 때
앞서 율법학자들과 조상 전통 문제로 한바탕 하고 난 뒤
이방 지역으로 물러나 피정을 하려 하셨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아무리 그렇게 이해하려고 해도 예수님께서 다른 유대인들처럼
그렇게 이방인을 경멸하고 싫어하셨다면 어떤 이유로 가건
자기가 싫어하는 곳으로 갈 리가 없고
피정을 위해서라면 더더욱 그런 곳에 가실 리가 없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피정을 하러 쓰레기장에 가고,
개들을 사육하는 그 더럽고 시끄러운 곳에 쉬러 갑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의 인격과 거룩함을 믿는다면
예수님은 이방인을 싫어하시지 않았고 그러므로
티로에 가신 것이 잠시 쉬러 가신 것일지라도
그들이 찾아오는 것을 귀찮다고 거부하실 생각은 없었으며,
그들을 모욕 주러 가신 것이 아님은 틀림없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그 모욕적인 언사의 뜻은 무엇입니까?
주님께서는 이방 연인에게 모욕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모욕이 되지 않는 사람에게 모욕은 모욕이 아닌데
이방여인이 바로 이런 사람이고 주님을 그것을 알고 계셨을 겁니다.
그러면 이방여인은 어떤 면에서 모욕을 줘도 모욕이 안 되는 사람이고
주님께서는 그가 그런 사람임을 어떻게 아셨을까요?
물론 영적으로 꿰뚫어보는 눈으로 아셨겠지만 그것이 아니더라도
이방여인이 외간남자를 찾아온 것 자체가 그리고
아픈 딸을 둔 엄마라는 것 자체가 모욕을 모욕으로 받지 않게 한다는 것을
저도 알고 있으니 주님께서는 너무나 잘 알고 계셨을 겁니다.
아픈 딸을 둔 엄마는 딸을 위해 뭐든 할 수 있습니다.
딸의 병을 낫게 할 수 있다면 지옥에까지 내려 갈 수 있는데
강아지로 추락되는 것쯤은 아무 것도 아니고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모욕은 받지 않으려는 사람에게 모욕인데
높은 자리에서 치유를 부탁하는 사람이 아니라
살려달라고 매달리는 엄마의 처지이니 이미 자신을 낮출 대로 낮췄고
그래서 어떤 모욕도 각오가 되어 있어서 모욕이 될 수 없는 거지요.
저만 해도 모욕당할 각오를 하고 공사판에 가니 모욕이 되지 않고,
더 나아가 그 순간 모욕당하신 주님을 생각하며 그것을 받아들이니 제가
받은 모욕이 주님께 대한 사랑으로 바뀌는 경험을 자주는 아니어도 하지요.
그러므로 우리가 모욕을 당하는 것은 모욕을 받으려 하지 않고 오히려
칭찬과 존경을 받으려 하기 때문이고 그런 얕은 사랑에 머물기 때문입니다.
얕은 사랑이라면?
위로와 칭찬과 존경 같은 것만 받으려는 사랑은 얕은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자기든 자녀든 정말 사랑하면 모욕에도 끄떡없을 사람으로 만들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