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 평화를 빕니다.
오늘은 제가 처음으로 성당에 갔었던 날에
대해서 얘기해볼까 합니다. 전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중3때 처음으로 대구 두류성당이라는
곳을 가보게 되었습니다. 그 전에는 어렸을 때에
친구따라 교회에 몇번 가본적이 있었습니다.
그때에는 믿어서 간것이 아니라 가면 달란트라고
하는 종이 돈을 줬었는데 그 돈을 모아서 교회에서
하는 은총시장같은것을 하면 먹을것 장난감 등등
여러가지를 살수가 있어서 교회에 간것 말고는
더는 없었습니다. 난생 처음으로 성당이라는 곳을
갔을때에는 마침 미사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분위기는 어렸을적 갔었던 교회와는 너무나도
다르게 엄숙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너무
이상하다싶을 정도로 떠드는 사람도 없었고
잡담하는 사람도 전혀 없었습니다. 그리고 전
숫자가 적혀있는 어떤 게시판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때 당시 게시판은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입장:445 봉헌:216 모심:163 퇴장:63"
전 숫자가 적힌 게시판을 보고서는 공포와 무서움,
그리고 두려움에 사로잡혔었습니다. 왜냐하면 전
이렇게 생각했었기 때문입니다.
"입장한 사람들의 수가 445명,,봉헌금을 낸
사람들의 수가 216명,,모심은 아무리봐도 이해가
안되고,,퇴장??63? 떠들다가 쫒겨나간사람들의
수가 63명?!! 그제서야 전 천주교 신자들이 왜
예배당에서 기도할때 떠드는 사람도 잡담하는
사람도 없는지를 알것만 같았습니다.
이렇게 쫒아내고 숫자로 체크해 두니 당연이
사람들은 안떠들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리고 전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아,,놔,, 진짜,,엄마는 왜 날 이런데 데리고
와가지고 진짜,, 아직 신자가 된것도 아닌데
성당에 안간다고 얘기할까?? 어떻하지? 앞으로
이런데를 어떻게 다녀,,,?" 그러면서 전 고개를
푹 숙인체 앉았다 일어섰다 하다보니 중앙에서
기도하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전 저분이
목사님같은 분이라고 생각했고 사이드에서
힌옷을 입고 근엄한 표정으로 서있는 사람들이
누가 떠드는지 지켜보다가 쫒아내고 숫자를
체크하는 사람인줄 알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무서움과 공포분위기 속에서 시간이 지났고
갑자기 사람들이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옆에 있는 분의 성가책을 보니 216쪽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성가책을 펴서
216쪽을 폈습니다. 그런데 가만이 보니 216번이
낮이 익은 번호였습니다. 그 번호는 바로 숫자가
적힌 게시판에 있던 :봉헌:216번"이었던 것이었
습니다. 그제서야 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봤던 게시판은 사람수를 체크하는 게시판이
아니라 "성가 게시판"이었던 것이었습니다.
그제서야 전 모든 오해가 풀렸습니다.
거기에서 제가 두려워하고 무서워해야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잡담하지않고 떠들지 않은
이유는 쫒겨나 퇴장당할까봐서가 아니라
하느님께 경건하게 기도하기 위해서였다는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모든 오해가 풀리고 나서는
마침내 안도의 한숨을 쉴수가 있었고 제 마음은
평화롭고 기뻤습니다. 전 짧은 미사시간에서
마치 천국과 지옥을 경험한 듯 했습니다.
무서움과 두려움에서 기쁨과 평화의 체험이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체험 한가운데에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사람수를 체크하는
게시판이라고 생각할 때에는 두려웠지만
성가 게시판이라는 생각을 할때에는 평화로움
이었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마음이 달라지고 변한다는 것을 성당에
처음으로 갔었던 날의 체험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당시 중3때에는 몰랐었지만 성인이
되고나서 그때의 체험이 중요한 체험이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죠. 오늘 복음에서 헤로데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 났구나"하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보고
죽은 세례자 요한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세례자 요한을 죽인것에 대한
두려움과 양심의 가책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마음속 생각이 있지도 않은 사실을 만들어 내고
현실을 상상하게 하는 것입니다. 마치 제가 성가
게시판을 사람수를 체크하는 게시판으로 알아서
있지도 않은 현실과 사실을 상상하고 만들어냈던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의 "생각" 이렇게 현실과
사실을 보게 한다면 우리는 어떠한 생각과 믿음을
지녀야 할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1독서의 말씀에서 그 의미를
되새겨 볼까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그러므로 우리는 확신을 가지고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주님께서 나를 도와주는
분이시니 나는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사람이
나에게 무엇을 할 수 있으라?"" 우리의 기억과
생각의 모든것을 나를 도와주시고 이끌어 주시는
사랑이신 하느님"을 생각할 때에 우리는 세상의
어려움을 기꺼이 이겨낼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 바라보는 세상도 생각의 변화를
통해 세상도 바뀌게 될 것입니다. 그때의 성당에
처음으로 가서 두려움에 떨었던 그 중3소년은
이제 수도복을 입고 매일미사를 봉헌합니다.
지금도 가끔 성가 게시판을 볼때마다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고 입가에 약간의 미소를
머금게 합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의 생각과
기억을 나를 이끌어 주시는 사랑이신 하느님께
젖어드는 하루가 되었으면 합니다. 아멘.
오늘은 제가 처음으로 성당에 갔었던 날에
대해서 얘기해볼까 합니다. 전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중3때 처음으로 대구 두류성당이라는
곳을 가보게 되었습니다. 그 전에는 어렸을 때에
친구따라 교회에 몇번 가본적이 있었습니다.
그때에는 믿어서 간것이 아니라 가면 달란트라고
하는 종이 돈을 줬었는데 그 돈을 모아서 교회에서
하는 은총시장같은것을 하면 먹을것 장난감 등등
여러가지를 살수가 있어서 교회에 간것 말고는
더는 없었습니다. 난생 처음으로 성당이라는 곳을
갔을때에는 마침 미사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분위기는 어렸을적 갔었던 교회와는 너무나도
다르게 엄숙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너무
이상하다싶을 정도로 떠드는 사람도 없었고
잡담하는 사람도 전혀 없었습니다. 그리고 전
숫자가 적혀있는 어떤 게시판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때 당시 게시판은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입장:445 봉헌:216 모심:163 퇴장:63"
전 숫자가 적힌 게시판을 보고서는 공포와 무서움,
그리고 두려움에 사로잡혔었습니다. 왜냐하면 전
이렇게 생각했었기 때문입니다.
"입장한 사람들의 수가 445명,,봉헌금을 낸
사람들의 수가 216명,,모심은 아무리봐도 이해가
안되고,,퇴장??63? 떠들다가 쫒겨나간사람들의
수가 63명?!! 그제서야 전 천주교 신자들이 왜
예배당에서 기도할때 떠드는 사람도 잡담하는
사람도 없는지를 알것만 같았습니다.
이렇게 쫒아내고 숫자로 체크해 두니 당연이
사람들은 안떠들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리고 전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아,,놔,, 진짜,,엄마는 왜 날 이런데 데리고
와가지고 진짜,, 아직 신자가 된것도 아닌데
성당에 안간다고 얘기할까?? 어떻하지? 앞으로
이런데를 어떻게 다녀,,,?" 그러면서 전 고개를
푹 숙인체 앉았다 일어섰다 하다보니 중앙에서
기도하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전 저분이
목사님같은 분이라고 생각했고 사이드에서
힌옷을 입고 근엄한 표정으로 서있는 사람들이
누가 떠드는지 지켜보다가 쫒아내고 숫자를
체크하는 사람인줄 알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무서움과 공포분위기 속에서 시간이 지났고
갑자기 사람들이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옆에 있는 분의 성가책을 보니 216쪽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성가책을 펴서
216쪽을 폈습니다. 그런데 가만이 보니 216번이
낮이 익은 번호였습니다. 그 번호는 바로 숫자가
적힌 게시판에 있던 :봉헌:216번"이었던 것이었
습니다. 그제서야 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봤던 게시판은 사람수를 체크하는 게시판이
아니라 "성가 게시판"이었던 것이었습니다.
그제서야 전 모든 오해가 풀렸습니다.
거기에서 제가 두려워하고 무서워해야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잡담하지않고 떠들지 않은
이유는 쫒겨나 퇴장당할까봐서가 아니라
하느님께 경건하게 기도하기 위해서였다는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모든 오해가 풀리고 나서는
마침내 안도의 한숨을 쉴수가 있었고 제 마음은
평화롭고 기뻤습니다. 전 짧은 미사시간에서
마치 천국과 지옥을 경험한 듯 했습니다.
무서움과 두려움에서 기쁨과 평화의 체험이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체험 한가운데에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사람수를 체크하는
게시판이라고 생각할 때에는 두려웠지만
성가 게시판이라는 생각을 할때에는 평화로움
이었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마음이 달라지고 변한다는 것을 성당에
처음으로 갔었던 날의 체험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당시 중3때에는 몰랐었지만 성인이
되고나서 그때의 체험이 중요한 체험이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죠. 오늘 복음에서 헤로데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 났구나"하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보고
죽은 세례자 요한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세례자 요한을 죽인것에 대한
두려움과 양심의 가책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마음속 생각이 있지도 않은 사실을 만들어 내고
현실을 상상하게 하는 것입니다. 마치 제가 성가
게시판을 사람수를 체크하는 게시판으로 알아서
있지도 않은 현실과 사실을 상상하고 만들어냈던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의 "생각" 이렇게 현실과
사실을 보게 한다면 우리는 어떠한 생각과 믿음을
지녀야 할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1독서의 말씀에서 그 의미를
되새겨 볼까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그러므로 우리는 확신을 가지고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주님께서 나를 도와주는
분이시니 나는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사람이
나에게 무엇을 할 수 있으라?"" 우리의 기억과
생각의 모든것을 나를 도와주시고 이끌어 주시는
사랑이신 하느님"을 생각할 때에 우리는 세상의
어려움을 기꺼이 이겨낼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 바라보는 세상도 생각의 변화를
통해 세상도 바뀌게 될 것입니다. 그때의 성당에
처음으로 가서 두려움에 떨었던 그 중3소년은
이제 수도복을 입고 매일미사를 봉헌합니다.
지금도 가끔 성가 게시판을 볼때마다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고 입가에 약간의 미소를
머금게 합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의 생각과
기억을 나를 이끌어 주시는 사랑이신 하느님께
젖어드는 하루가 되었으면 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