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독서와 화답송과 복음은 하느님의 구원에 대한 찬가입니다.
곧, 사무엘의 엄마 한나의 찬가와 마리아의 찬가입니다.
그런데 마리아의 찬가는 사실 마리아의 찬가라기보다는
초대교회의 찬미를 마리아의 입을 빌려서 한 찬미라는 주장들이 있고,
초대교회의 찬미는 한나의 찬미를 바탕으로 하였다는 주장이 있을 정도로
마리아의 찬가와 한나의 찬미는 비슷한 내용이 많습니다.
우선 한나나 마리아 모두 자신을 비천한 자로 인식한다는 면에서 같습니다.
그러므로 아주 겸손한 자의 찬가입니다.
사실 찬미는 아무나 할 수 없습니다.
겸손하지 않고는 찬미할 수 없고,
겸손도 얼치기 겸손이나 정말로 가장 밑바닥까지
자신을 낮출 수 없는 겸손은 찬미할 수 없습니다.
또한 찬미는 아무에게나 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일이나 큰일을 해도 인간에게는 감사까지만 하고
찬미는 하지 않으며 만일 인간에 대한 칭송이 찬미의 수준이라면
그것은 북한의 김일성처럼 신격화하고 우상화한 경우일 뿐입니다.
제가 북한에 갔을 때 돌에 새겨져 있는 것을 여기저기서 본 것이
바로 ‘우리의 수령님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문구였지요.
또한 찬미는 아무나 할 수 없고 아무에게나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무 것이나 가지고 찬미를 할 수는 없습니다.
별 거 아닌 것을 가지고 감사는 할 수 있지만 찬미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누가 백억을 주면 감사는 해도 찬미는 하지 않고
병을 고쳐줘도 감사는 해도 찬미를 드리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다시 정리를 할 수 있겠습니다.
첫째로 밑바닥까지 자신을 낮출 수 있는 겸손한 사람만이 찬미할 수 있다고
앞에서 얘기했는데 그 바닥이라는 것이 실은 하느님 발밑이지요.
그러니까 우리는 땅바닥에까지 머리를 숙이고 더 나아가서 부복할 정도로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낮출 때 찬미는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찬미는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
곧 하느님의 창조와 하느님의 구원을 체험한 사람만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아름다운 것을 보며 아름다움을 창조하신 하느님을 찬미하고
우리 존재를 있게 하신 하느님을 찬미하고, 그리고
오늘 한나와 마리아가 찬미하듯 존재를 있게도 하고 없어지게도 하시며,
끌어올리기도 하고 낮추기도 하시고, 가멸지게도 하고 가난하게도 하시는,
한 마디로 우리 존재를 쥐락펴락하시는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구원을 체험한 사람만이 구원의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나병을 치유 받은 열 명 중에서 하느님께 영광찬미 드리러온 사람은
이방인 한 사람뿐이라고 주님께서 한탄하셨는데 다른 아홉도
감사는 드렸지만 하느님의 구원을 체험하는 것에까지는 이르지 못했기에
아마 찬미를 드리러 오지 않았을 겁니다.
이렇게 찬미를 드리지 않은 나병환자와 찬미를 드린 한나와 마리아를 보며
나는 어떻게 했나 저의 찬미의 역사를 이참에 묵상해봤는데
하느님께 찬미를 드린 적이 아주 드물었고,
감사까지는 드렸어도 찬미는 드리지 못했음이 성찰되었습니다.
감사도 잘 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으니 그것에 비하면
감사를 잘 드리는 것만도 대단하다 할 수 있지만
찬미에 비하면 감사는 어떤 것이든 좋은 것이 주어졌을 때 하게 되는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면이 있기에 이런 저를 반성하는 오늘입니다.
주님께 맡겨드리며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