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이 왔다.’고 하고 말할 것이다.”
오늘 복음은 멸망의 때에 일어날 일들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전쟁과 반란이 일어나고 모든 것들이 다 허물어질 터인데
그때 가짜 그리스도도 나타난다고 하시며 속지 말라 하십니다.
멸망의 때가 오면 사람들이 당황하여
아무나 자기를 구원해줄 거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는 병원에서 불치병이라고 판단을 받은 환자가
이 의사 저 의사를 찾아나서는 것과 같은 현상입니다.
사실 이런 때에 대비가 되어있지 않은 사람은 누구나 당황하기 마련이고,
그래서 우리는 늘 멸망의 때를 대비해 살아야 하는데
이것을 신앙적으로는 종말론적인 신앙을 산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종말론적인 신앙을 잘 사는 것은 멸망의 때를 잘 대비하는 것이고,
멸망의 때를 잘 대비한 사람은 당황치 않고 침착하게 종말을 맞이할 겁니다.
자신의 멸망이 아니고 세상의 종말이며,
자신의 멸망이 아니라 구원자를 만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종말의 때에 우리는
자신의 멸망을 만나지 말고 주님을 만나도록 합시다.
그렇지요. 건강할 때의 우리는 의사를 찾지 않고
아프더라도 웬만큼 아프면 명의까지 찾지 않아도 됩니다.
아플 때 의사가 필요하고 중병일 때 명의가 필요한 거지요.
이와 같이 우리는 종말의 때에 구원자 주님을 찾고 주님을 만나게 되기에
오히려 우리는 종말의 때를 주님을 만나는 좋은 기회로 생각하면 되는데
종말이 닥쳐와도 우리가 구원자 주님을 올바로 찾아 만나기 위해서는
다급할 때만 주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늘 만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는 마치 명의를 주치의로 두고 상비약을 늘 옆에 두는 것과 같지요.
사실 저를 찾는 사람이랄까 만나는 사람이 크게 두 부류입니다.
어려울 때 찾는 사람과 늘 만나는 사람입니다.
살만할 때는 찾지 않다가 어려울 때만 찾는 사람을 보면
필요할 때만 찾는 그의 얄팍함이 얄밉기도 하고
제가 그런 사람밖에 되지 않음이 씁쓸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제가 불필요한 사람보다 필요한 사람이 되는 것만으로도 만족하지요.
그러나 저는 제가 필요한 사람보다 사랑하고 사랑받는 사람이길 바라고
저와 만나는 사람들도 필요 때문에 만나는 사람들이기보다는
사랑하기에 만나는 사람들이기를 바랍니다.
어제는 두 가지 스쳐가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는 이곳 수녀원에 오기 위해 꼭두새벽에 혼자 미사를 봉헌하는데
위령성월의 끝 무렵에 죽은 친구들이 생각나 그들을 위해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이 친구들 살아있을 때 제가 데면데면하여 한 번도 찾아가지 않았지만
제 기도 속에 이렇게 자주 만나게 되는데 이것이 친구입니다.
하느님도 이런 친구들과 같습니다.
오후에는 수녀님들께 성사를 주고 산보를 나섰는데 고양이가 눈에 뗬습니다.
그런데 고양이 특유의 그 경계하는 모습이 그리 안 좋게 느껴지며
개와 고양이를 비교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고양이와 개를 데리고 살다가 두고 이사를 갈 경우
고양이는 결코 사람을 따라가지 않고 자기가 살던 곳에 남지만
개는 주인을 끝까지 따라간다고 하지요.
우리는 고양이가 아니라 개처럼 주님을 떠날 수 없는 사람들이고
멸망의 때가 되어서야 주님을 찾는 사람이 아니라 늘 만나는 사람들입니다.
머무르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