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다.”
오늘 복음에서 가난한 과부의 헌금에 대해 주님께서 칭찬하시지만
저는 긍정 평가는 하지만 대단한 행위인 양 칭찬하고픈 마음은 없습니다.
가지고 있는 것을 다 봉헌하는 것은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어렵고,
조금 가지고 있으면 그럴수록 쉽기 때문입니다.
또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도 넣은 액수만 가지고, 그러니까
부자가 더 많이 넣었다는 것만 가지고 부자의 봉헌을 높이 사고,
과부의 봉헌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지요.
사실 100억을 가진 사람이 다 봉헌하는 것과
100원을 가진 사람이 다 봉헌하는 것을 비교하면
100원을 다 봉헌하는 것이 훨씬 쉽지요.
그러기에 오늘 제가 여기에서 얘기하는 관점은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고
가난한 사람이 하느님 나라에 훨씬 유리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 가지 관점에서 다 그렇습니다.
봉헌하는 것도 가난할수록 봉헌하기 쉽고
하느님 나라에 가는 것도 가난할수록 버리고 떠나기 쉽고,
이웃을 향한 사랑도 가난할수록 가진 것을 나누기 쉬우니
그러기에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위한 가난을 살아야 하는 거지요.
또 다른 관점은 이것입니다.
곧 우리의 현실에서 가난한 사람의 봉헌을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는 겁니다.
오늘 주님께서 이 말씀을 굳이 하신 이유는 사람들이 넣은 액수만 가지고
많이 넣은 사람은 우대하고 적게 넣은 사람은 천대하는 일이 비일비재한데
그래서는 안 된다는 거지요.
이것은 참으로 찔리는 얘깁니다.
우리의 성당과 수도원에서 우대받는 사람이 누구이고
천대까지는 아니어도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리고 저만해도 가난한 사람을 우선 선택을 한다 하는데
그것은 의지적으로 우선 선택을 하려는 것이지
자연스레 우대하는 것은 기여를 더 많이 하는 사람입니다.
예를 들어 북한 돕기를 할 때 할머니들의 작은 봉헌을
제가 소중히 하고 더 감사하는 마음이 없지 않았지만
솔직히 후원을 더 많이 하는 사람들을 내심 반겼지요.
아무튼 오늘 복음은 무슨 어려운 얘기도 신학적 담론도 아닙니다.
그저 어제께 그리스도 왕 축일을 지낸 우리의 실천의 문제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우대와 천대가 없는 곳이라는 것을 우리가 머리로
아는데 실천은 얼마나 하느냐 거기에 우리의 하느님 나라가 있습니다.
이것을 깊이 성찰하고 반성하는 오늘입니다.
늘 형제애를 느끼게 하는 수사님의 말씀에
오늘도 감사합니다.
그리고 레오나르도 수사님! 축일 축하드립니다.
작년에 하려던 일의 실천은 반도 안되게 중간에 짤리고..한 개라도 다시 정리해 보는 한 주간을 보내겠습니다.
형제회 안에도 분명 존재감 여부가 있지만 스스로 느끼는 우월감도 봐주며 공동체가 나아가지고 있는것 같습니다.
건강한 하루 되세요~~^^
주님의 사랑과 은총속에서 늘 건강하시고 평안하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