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를 빕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 사부 성 프란치스코 대축일 전 준비 9일 기도 중 그 첫째 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주제는 “하느님 사랑 안의 회개 생활”이며, 우리는 이 주제와 성 프란치스코의 회개 생활을 통하여 오늘 하루를 묵상하고 살아가고자 합니다.
그렇다면 회개란 무엇입니까? 회개, 즉 그리스어로 metanoia는 ‘방향전환’, ‘가치관의 변화’, ‘하느님 중심적인 생활로의 변화’ 또는 ‘돌아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그릇된 생활과 사고방식, 행동 관습에서 벗어나, 신앙생활로 들어가는 심정의 변화이며, 믿음과 더불어 주님을 향한 마음의 변화입니다.
결국, 회개한다는 것은 죄에서 떠나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것을 말하며, 이 회개는 한 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삶 안에서 끊임없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우리 사부 성 프란치스코는 매 순간 끊임없이 회개의 삶을 살아오셨고, 우리는 그의 회개의 시작을 유언의 도입 부분에서 잘 살펴볼 수 있습니다.
“주님이 나 프란치스코 형제에게 이렇게 회개생활을 시작하도록 해 주셨습니다. :내가 죄 중에 있었기에 나병환자들을 보는 것이 나에게는 너무나 역겨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 친히 나를 그들에게 데리고 가셨고 나는 그들 가운데서 자비를 베풀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들한테서 떠나올 때에는 역겨웠던 바로 그것이 내게 있어 몸과 마음의 단맛으로 변했습니다. 그리고 그 후 얼마 있다가 나는 세속을 떠났습니다.”
프란치스코의 유언, 이 첫 단락에는 프란치스코의 회개 여정의 서막인 나병환자들과의 만남을 알림과 동시에 그의 회개 생활의 핵심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주님이 나 프란치스코 형제에게 이렇게 회개 생활을 시작하도록 해 주셨습니다.” 여기에서 프란치스코느 ‘내가 회개 생활을 이렇게 시작했습니다.’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주님 친히 내가 회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셨다.’라고 고백합니다. 즉, 내가 스스로 내 의지를 가지고 이 회개 생활을 시작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개입, 은총에 힘입어 내가 이 회개의 삶을 살아갈 수 있었다’라는 말입니다. 이를 확대 해석하자면 ‘나는 그 분의 이끄심이 아니었으면 이 회개의 삶을 살아갈 수가 없었다.’라는 말로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결국, 프란치스코의 회개는 자신의 의지와 결정에 의한 것이 아닌,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온전한 응답이었으며, 그 회개의 주체가 프란치스코의 자신의 의지가 아닌 주님의 이끄심에 있었습니다. 프란치스코가 고백하듯 그에게 있어 제일 싫어하고, 역겨운 일은 “나병환자들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서 나병환자란 단순한 나병을 가진 이들 이라기보다 내 안에 허물, 역겨움, 두려움 등이 아닐까요?
그래서 그가 “죄 중에 있었을 때”는 나병환자들을 보는 것 자체가 역겨움이었으며 이들을 피하고 경멸하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프란치스코는 자신이 두려워하는 나병환자들을 직접 찾아간 것이 아닌, “주님 친히 나를 그들에게 데리고 가셨고”라고 고백함으로써 주님께서 나를 그들 가운에게 이끄셨기 때문에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 수 있었다라고 말합니다. 이는 자신의 삶의 중심을 자신에게가 아닌, 주님께 두었기에 할 수 있었던 고백입니다. 즉, 주님은 인간이 할 수 없는 일, 두려워하는 일, 피하고 싶은 일에 직면하게끔 우리를 이끌어 주시고, 우리가 이 상황에 직면했을 때야 비로소 그 상황을 극복하고 몸과 마음의 단 맛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프란치스코에 있어 ‘회개’라는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총의 선물이며, 이 성령의 은총으로 우리는 마음을 열어 하느님의 사랑에로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그의 회개의 동기는 ‘하느님께 대한 무한한 사랑’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첼라노 1생애 4항에 기록되어 있듯이 회개를 하고 회개의 삶을 살고자 노력한다 해도 “습관된 것에서 떠나기란 쉽지 않으며, 일단 마음속에 들어앉은 것들은 쉽사리 사그라지지 않기에 마음은 비록 오랫동안 멀리 떨어져 있었다 해도, 처음 것으로 쉽게 돌아가고 말며, 계속적인 반복에 의하여 악은 흔히 제 2의 천성이 되고야 마는 것”이 나약한 우리의 현실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회개의 삶을 일상의 삶 안에서 실행하기 위하여 내 자신의 습관, 내 마음의 욕구를 잘 다스려야 합니다. 지금까지 짧은 인생을 살아오면서 우리는 이미 세속에 물들 대로 물들었고 이러한 습관된 것들을 버리기가 여간 쉽지 않음을 느낍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진정으로 내 마음 속에서 내가 갈구하고 추구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스스로 뾰족하고 비판된 눈으로 바라보아야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매일의 삶을 반성하는 시간이 필요하며, 매 순간 내 마음의 욕구의 움직임을 체크하고, 나 자신과 친숙해져야 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게 바로 회개의 삶이 아닐까요?
우리는 이와 같은 회개의 삶을 통하여 우리 안에서 발견되는 나의 거짓된 자아, 꾸민 나의 모습들, 이상적인 나의 모습을 벗어 버리고, 하느님께서 창조하시고 사랑하시는 나의 참된 자아를 찾아 그 나의 모습을 사랑하는데 온 힘을 쏟아야 할 것입니다.
이럴 때 우리 위에 주님의 영이 내리고, 주님이 우리를 “거처와 집으로 삼으실 것이며”, 우리들이 아버지의 일을 하기에, 우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들이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정배들이요 형제들이요 어머니들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하루, 매 순간 회개의 삶을 살아가도록 노력하는 하루가 되시길 바랍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 사부 성 프란치스코 대축일 전 준비 9일 기도 중 그 첫째 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주제는 “하느님 사랑 안의 회개 생활”이며, 우리는 이 주제와 성 프란치스코의 회개 생활을 통하여 오늘 하루를 묵상하고 살아가고자 합니다.
그렇다면 회개란 무엇입니까? 회개, 즉 그리스어로 metanoia는 ‘방향전환’, ‘가치관의 변화’, ‘하느님 중심적인 생활로의 변화’ 또는 ‘돌아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그릇된 생활과 사고방식, 행동 관습에서 벗어나, 신앙생활로 들어가는 심정의 변화이며, 믿음과 더불어 주님을 향한 마음의 변화입니다.
결국, 회개한다는 것은 죄에서 떠나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것을 말하며, 이 회개는 한 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삶 안에서 끊임없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우리 사부 성 프란치스코는 매 순간 끊임없이 회개의 삶을 살아오셨고, 우리는 그의 회개의 시작을 유언의 도입 부분에서 잘 살펴볼 수 있습니다.
“주님이 나 프란치스코 형제에게 이렇게 회개생활을 시작하도록 해 주셨습니다. :내가 죄 중에 있었기에 나병환자들을 보는 것이 나에게는 너무나 역겨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 친히 나를 그들에게 데리고 가셨고 나는 그들 가운데서 자비를 베풀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들한테서 떠나올 때에는 역겨웠던 바로 그것이 내게 있어 몸과 마음의 단맛으로 변했습니다. 그리고 그 후 얼마 있다가 나는 세속을 떠났습니다.”
프란치스코의 유언, 이 첫 단락에는 프란치스코의 회개 여정의 서막인 나병환자들과의 만남을 알림과 동시에 그의 회개 생활의 핵심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주님이 나 프란치스코 형제에게 이렇게 회개 생활을 시작하도록 해 주셨습니다.” 여기에서 프란치스코느 ‘내가 회개 생활을 이렇게 시작했습니다.’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주님 친히 내가 회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셨다.’라고 고백합니다. 즉, 내가 스스로 내 의지를 가지고 이 회개 생활을 시작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개입, 은총에 힘입어 내가 이 회개의 삶을 살아갈 수 있었다’라는 말입니다. 이를 확대 해석하자면 ‘나는 그 분의 이끄심이 아니었으면 이 회개의 삶을 살아갈 수가 없었다.’라는 말로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결국, 프란치스코의 회개는 자신의 의지와 결정에 의한 것이 아닌,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온전한 응답이었으며, 그 회개의 주체가 프란치스코의 자신의 의지가 아닌 주님의 이끄심에 있었습니다. 프란치스코가 고백하듯 그에게 있어 제일 싫어하고, 역겨운 일은 “나병환자들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서 나병환자란 단순한 나병을 가진 이들 이라기보다 내 안에 허물, 역겨움, 두려움 등이 아닐까요?
그래서 그가 “죄 중에 있었을 때”는 나병환자들을 보는 것 자체가 역겨움이었으며 이들을 피하고 경멸하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프란치스코는 자신이 두려워하는 나병환자들을 직접 찾아간 것이 아닌, “주님 친히 나를 그들에게 데리고 가셨고”라고 고백함으로써 주님께서 나를 그들 가운에게 이끄셨기 때문에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 수 있었다라고 말합니다. 이는 자신의 삶의 중심을 자신에게가 아닌, 주님께 두었기에 할 수 있었던 고백입니다. 즉, 주님은 인간이 할 수 없는 일, 두려워하는 일, 피하고 싶은 일에 직면하게끔 우리를 이끌어 주시고, 우리가 이 상황에 직면했을 때야 비로소 그 상황을 극복하고 몸과 마음의 단 맛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프란치스코에 있어 ‘회개’라는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총의 선물이며, 이 성령의 은총으로 우리는 마음을 열어 하느님의 사랑에로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그의 회개의 동기는 ‘하느님께 대한 무한한 사랑’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첼라노 1생애 4항에 기록되어 있듯이 회개를 하고 회개의 삶을 살고자 노력한다 해도 “습관된 것에서 떠나기란 쉽지 않으며, 일단 마음속에 들어앉은 것들은 쉽사리 사그라지지 않기에 마음은 비록 오랫동안 멀리 떨어져 있었다 해도, 처음 것으로 쉽게 돌아가고 말며, 계속적인 반복에 의하여 악은 흔히 제 2의 천성이 되고야 마는 것”이 나약한 우리의 현실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회개의 삶을 일상의 삶 안에서 실행하기 위하여 내 자신의 습관, 내 마음의 욕구를 잘 다스려야 합니다. 지금까지 짧은 인생을 살아오면서 우리는 이미 세속에 물들 대로 물들었고 이러한 습관된 것들을 버리기가 여간 쉽지 않음을 느낍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진정으로 내 마음 속에서 내가 갈구하고 추구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스스로 뾰족하고 비판된 눈으로 바라보아야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매일의 삶을 반성하는 시간이 필요하며, 매 순간 내 마음의 욕구의 움직임을 체크하고, 나 자신과 친숙해져야 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게 바로 회개의 삶이 아닐까요?
우리는 이와 같은 회개의 삶을 통하여 우리 안에서 발견되는 나의 거짓된 자아, 꾸민 나의 모습들, 이상적인 나의 모습을 벗어 버리고, 하느님께서 창조하시고 사랑하시는 나의 참된 자아를 찾아 그 나의 모습을 사랑하는데 온 힘을 쏟아야 할 것입니다.
이럴 때 우리 위에 주님의 영이 내리고, 주님이 우리를 “거처와 집으로 삼으실 것이며”, 우리들이 아버지의 일을 하기에, 우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들이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정배들이요 형제들이요 어머니들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하루, 매 순간 회개의 삶을 살아가도록 노력하는 하루가 되시길 바랍니다.
뾰족하고 비판된 눈으로 보고자 노력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