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십여 일 전 쯤,
아마 자비를 구하는 소경 바르티메오의 얘기를 들은 날,
그날도 일 나가기 전 혼자 새벽미사를 봉헌하며 영성체 후 묵상을 하는데
문득 ‘내 안에 주님을 이렇게 모시고 있는데
뭣 하러 자비를 밖에서 구하는가?’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이 내 안에 계시는데 자비를 밖에서 구한다는 것은
하느님과 내가 따로 떨어져 있다는 뜻이 아니고 뭡니까?
그러면서 내 밖에 나와 멀리 떨어져 계신 하느님을 부르며
어서 빨리 오시어 저를 구하여주십사고 청하는 것입니다.
내 안에 주님이 계신 줄 모르고 밖의 주님을 찾는 것인가요? 아니면
내 안의 주님을 밖으로 몰아내고선 다시 밖에서 주님을 찾는 건가요?
저와 같이 이런 사람이 적지 않기 때문인지 그래서 오늘 2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하느님의 영께서 우리 안에 계시는 것이 사실입니까, 아닙니까?
계시는 것이 사실이면 이제 내가 성전이라는 것을 잘 인식하고,
내 안에 계신 주님을 늘 의식하며 성전답게 살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성녀 클라라는 아주 뜻 깊은 얘기를 합니다.
“동정녀께서는 당신의 거룩한 태중인 작은 봉쇄 안에
그분을 모셨고, 처녀의 품으로 안으셨습니다.”
이 얼마나 탁월한 통찰입니까?
클라라는 수도원이 봉쇄 공간이 되기를 바랐고
거기서 자매들과 함께 공동의 정배인 주님과 사랑을 나누려고도 하였지만
자신의 태가 봉쇄 공간이 되기를 바랐고
거기서 누구의 방해를 받지 않고 홀로 아들 예수와 밀애를 나누고자 했지요.
우리의 성전 축일도 이러해야 합니다.
내 안의 성전을 놔두고 밖의 성전만 정화하고,
내 안의 성전을 축하하지 않고 밖의 성전만 축하해선 안 됩니다.
그러나 성전건립을 축하하기 전에 먼저 성전을 정화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미 축성된 성전이시기에 정화가 필요치 않고
예루살렘 성전을 정화하실 수 있지만 우리는 성전은 성전이로되
정화가 필요한 성전이니 먼저 정화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정화 역시 클라라가 얘기하는 정화가 더 탁월합니다.
죄와 욕망의 자신을 씻으려는 정화보다 주님을 사랑하는 정화이고
주님을 수태하는 인격적 정화를 그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분을 사랑할 때 그대는 정결하고,
그분을 만질 때 그대는 더욱 깨끗해지며,
그분을 맞아들일 때 그대는 동정녀입니다.”
내가 깨끗한 것이 우리의 정화와 정결의 목적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고 모셔 들이고 일치하는 것이 정화와 정결의 목적이지요.
사랑치 않고 일치치 않는 정화와 정결은 결벽증처럼 자기만족일 뿐입니다.
이제 자기를 정화한 우리는 밖의 성전들을 정화해야 합니다.
그것도 건물 성전이 아니라 사람 성전들의 정화가 우선되어야 합니다.
나도 더러운데 어찌 남 더럽다고 하느냐고 발뺌하지 말고
우리 같이 주님의 성전이 되자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구원을 밖에서 구하지 않아도 생명을 안에서 누리는 우리가 되고
오늘 에제키엘서의 말씀처럼 우리의 성전에서 나오는 물, 곧 사랑으로
다른 사람들도 생명을 누리게 하는 것입니다.
죄와 욕심으로 더럽혀진 성전이 아니라
사랑과 생명이 가득하고 넘치는 성전이 되자고 같이 다짐하는 오늘입니다.
잘 다녀 오십시오. 선교의 사명 완성하시구요...
그 분을 만질 때 그대는 깨끗해 지며
그 분을 맞아들알 때 그대는 동정녀가 됩
니다." 나의 욕망을 씻으려는 정화보다
주님을 더욱 뜨겁게 사랑하는 정화로 나아가겠습니다. 참 고귀한 묵상에 가슴이 떨려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