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바보 같은 질문인지 모르지만
교회는 왜 모든 성인의 날을 지낼까?
예를 들어 우리 순교자 중에 103위 말고도 무명의 순교자가 많고
그들도 성인으로 손색이 없는데 성인으로 공경하지 않는 것이
미안하고 죄송하여 한 번에 몰아서 축일을 지내는 것과 같은 걸까요?
또 수도원에서 원장의 영명축일은 크게 축하해주는데
다른 형제들은 그렇게 해줄 수 없으니 몰아서 축하하는 것과 같은 걸까요?
그런 것은 아닐 것입니다.
성인들을 위해서 모든 성인의 날을 지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이 축일을 지내는 것이고 달리 말하면
우리도 모두 성인이 되라고 격려하기 위해서 지내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은 모든 성인을 축하하는 날이기보다는
우리가 모두 성인이 되기로 결심하는 날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성인의지를 얘기하고자 합니다.
<성인의지聖人意志>라?!
뭡니까? 무슨 뜻입니까?
말 그대로 성인이 되려는 의지를 가지라는 거지요.
사실 우리 신앙인들은 한 번쯤은 성인이 되려는 마음을 먹었을 겁니다.
그러다가 나이를 먹으면서 그러니까 성인은커녕 오히려 죄인인 자신을
발견하면서 실망이 절망이 되고 절망이 성인되는 것을 포기케 한 경험이
다들 있을 것이고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질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다면 이제 다시 성인 되려는 의지를 가지라는 것이
오늘 이 모든 성인의 날입니다.
종종 인생의 패배자들이 터무니없는 이상주의자인 경우를 봅니다.
도저히 이룰 수 없는 이상이나 목표를 세워놓고 당연히 실패하면
그것은 이룰 수 없는 것이라고 하며 자포자기를 합니다.
이상이나 목표를 실현 가능한 것으로 수정하거나 낮추려 하지 않고
꼭 그것이 이상이요 목표여야 한다고 집착하고 고집함으로써
한 걸음 나아가고, 한 계단 올라가지 않는 것을 합리화하곤 하지요.
매우 높은 이상을 얘기하면서도 자신은 꿈쩍도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그렇지 않은 것에 대해 매우 냉소적인데 그것이
매우 교만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교만보다는 어리석은 겁니다.
성인 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프란치스칸인 저나 여러분이 프란치스코만큼 성인이어야 하는 것 아닙니다.
프란치스코와 같은 성인은 프란치스코나 되는 것이고 나느
아무리 프란치스칸이어도 그리 될 수도 없고, 되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프란치스코의 영성과 은사를 할 수 있는 만큼 살려고 하는 것이
프란치스칸이고 그 의지가 있는 사람만 프란치스칸 자격이 있는 거지요.
그러니 우리가 모든 성인의 하나가 되려는 의지를 포기하지 않고,
높은 수준의 성인을 생각하며 괜히 자신을 죄인이나 열등한 존재로
만들지 말고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갈망하며 살면 됩니다.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이룬 사람이 성인이지만
이루려는 사람도 성인입니다.
적어도 이루려하지 않는 사람보다는 말입니다.
자학적인 성인이 아니라 행복한 성인이 되기로 다시 결심하는 오늘이기를...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 입니다."요한1서 3,2
주님 안에서 다 함께 기뻐하는 오늘을 주신 주님께 감사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