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속마음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진짜 마음이었을까?
만일 이것이 예수님의 속마음이었다면
저는 그리스도 교인이 되기 어렵겠습니다.
저는 이스라엘을 방문할 때마다 지금 이스라엘 사람들의
잘못되고도 고약한 선민의식 때문에 매우 불쾌해하고 분노하곤 합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심은
전 인류 구원을 위해 도구로 삼으심인데
이들이 보이는 것은 자기들만 구원에로 뽑히었고
다른 민족은 버림받은 족속인 양 무시하고 업신여기는 것입니다.
오늘 2독서의 바오로 사도처럼 모든 민족이 하느님의 자녀 되도록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을 받들어 섬겨야 할 사람들이
하느님께서 도구로 삼으신 것을 자랑하고 우월감만 가지고 있다면
모든 민족의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느님의 뜻은 무엇이며
오늘 가나안 여인에게 무안을 주신 주님의 속뜻은 무엇입니까?
모든 민족의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뜻은
모든 민족이 하느님 자녀가 되고
모든 민족이 자녀로서의 지위와 품위를 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함은 무슨 뜻입니까?
하느님의 자녀가 아니었던 사람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까?
그럴 리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이미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모두가 하느님의 자녀이지만
하느님의 자녀임을 거부하거나 모르던 사람이
이제 알게 되고 그 관계를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임을 알고 받아들이게 되면
모두, 누구나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지위와 품위를 살아갈 수 있고
우리는 그렇게 인정하고 존중해야 합니다.
“주님을 섬기고
주님의 이름을 사랑하며,
주님의 종이 되려고 주님을 따르는 이방인들,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않고 나의 계약을 준수하는 모든 이들을”
우리는 주님의 거룩한 산으로 인도하여
주님의 집은 모든 사람들이 기도하는 집이 되게 해야 합니다.
내가 믿는 종교를 믿어야지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슬람교의 알라신을 믿고 있어도
불교의 무신론을 신봉해도
우리는 그들을 하느님의 자녀로 받아들이고 존중해야 합니다.
성 프란치스코가 바로 그런 분이셨습니다.
십자군이 이슬람을 적으로 규정하고 정벌하러 갈 때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의 자녀요 우리의 형제인 이슬람 사람들에게
자기가 알고, 믿는 하느님을 전해주러 갔고
자기가 살고 있는 복음을 전해주러 갔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이슬람에게 가는 형제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사라센들과 다른 비신자들에게 가는 형제들은
그들 가운데서 두 가지 방법으로 영적으로 지낼 수 있습니다.
한 가지의 방법은 말다툼이나 논쟁을 하지 말고
하느님 때문에 모든 인간에게 복종하고
자신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일입니다.
또 다른 방법은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일이라고 볼 때에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여 그들로 하여금 전능하시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시며,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느님을 믿도록 하고,
구세주요 구원자이신 아드님을 믿도록 하여
그들이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하는 일입니다.”(미인준16장)
이렇게 이슬람에 갔었기에 순교를 무릅쓰고 갔건만
술탄은 오히려 프란치스코에게 감탄을 하여
선물을 주어서 돌려보냅니다.
틀림없이 아무런 적의 없이 형제에게 가장 좋은 것,
즉 하느님과 복음을 전하고자 한
그의 형제적 사랑을 만났기에 그랬을 것입니다.
구별 없는 그의 형제적 사랑이 모든 적개심을 무장 해제시키고
고마운 형제로 받아들이게 한 것입니다.
지난 목요일에는 밤 등산을 갔습니다.
길을 가는데 모든 사람의 관심사였던 양궁을 중계하고 있었습니다.
애써 듣지 않으려 했는데도 결과를 듣게 되었습니다.
우리 아이가 지고 중국 아이가 이겼습니다.
산을 오르는 동안 못마땅한 기분이 내내 가시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저 자신을 보니 한심스러웠습니다.
얼마나 도를 더 닦아야,
얼마나 프란치스칸으로 더 살아야 네 나라 내 나라 구분하지 않고
누가 이겨도 좋게 될까?
옛날 지역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제 고향을 버렸던 것처럼
이제 편협한 민족-국가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우리나라를 버려야하겠다,
내가 믿고 있는 천주교도 버려야하겠다 마음먹었습니다.
그러면 오늘 복음에서 가나안 여인을 주인집 강아지 취급하시며
당신은 이스라엘만을 위해 왔다고 하신 주님의 속뜻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민족적, 종교적 구별을 하시는 것일까요?
그런 것처럼 보이지만 그런 것이 전혀 아닙니다.
주님은 가나안 여인의 겸손과 믿음을 믿었던 것입니다.
이토록 무시를 하고 무안을 주어도
주님의 좋으심과 사랑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지 않을 것임을 믿으신 것이고
더 굳건해지도록 믿음을 흔드신 것입니다.
그리고 흔들어도 흔들리지 않는 가나안 여인의 믿음을
제자들이 보게 함으로 제자들을 부끄럽게 하고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시기하게 하고
믿음에 있어서 분발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느님께서 뽑으신 이스라엘이
참 신앙을 이방인에게 전해주어야 하는데
주님께서는 이방 여인을 통해서 이스라엘에 참 신앙을 일깨우시고
분발케 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는 주인집 자식으로 아쉬움 없이 모든 은총을 받았는데
주인집 강아지처럼 떨어지는 부스러기만 얻어먹는 이방 여인보다도
신앙이 작다는 말이냐
한 편으로는 꾸짖으면서
한 편으로는 제자들 약을 올리며 제자들에게 도전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진짜 마음이었을까?
만일 이것이 예수님의 속마음이었다면
저는 그리스도 교인이 되기 어렵겠습니다.
저는 이스라엘을 방문할 때마다 지금 이스라엘 사람들의
잘못되고도 고약한 선민의식 때문에 매우 불쾌해하고 분노하곤 합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심은
전 인류 구원을 위해 도구로 삼으심인데
이들이 보이는 것은 자기들만 구원에로 뽑히었고
다른 민족은 버림받은 족속인 양 무시하고 업신여기는 것입니다.
오늘 2독서의 바오로 사도처럼 모든 민족이 하느님의 자녀 되도록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을 받들어 섬겨야 할 사람들이
하느님께서 도구로 삼으신 것을 자랑하고 우월감만 가지고 있다면
모든 민족의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느님의 뜻은 무엇이며
오늘 가나안 여인에게 무안을 주신 주님의 속뜻은 무엇입니까?
모든 민족의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뜻은
모든 민족이 하느님 자녀가 되고
모든 민족이 자녀로서의 지위와 품위를 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함은 무슨 뜻입니까?
하느님의 자녀가 아니었던 사람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까?
그럴 리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이미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모두가 하느님의 자녀이지만
하느님의 자녀임을 거부하거나 모르던 사람이
이제 알게 되고 그 관계를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임을 알고 받아들이게 되면
모두, 누구나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지위와 품위를 살아갈 수 있고
우리는 그렇게 인정하고 존중해야 합니다.
“주님을 섬기고
주님의 이름을 사랑하며,
주님의 종이 되려고 주님을 따르는 이방인들,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않고 나의 계약을 준수하는 모든 이들을”
우리는 주님의 거룩한 산으로 인도하여
주님의 집은 모든 사람들이 기도하는 집이 되게 해야 합니다.
내가 믿는 종교를 믿어야지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슬람교의 알라신을 믿고 있어도
불교의 무신론을 신봉해도
우리는 그들을 하느님의 자녀로 받아들이고 존중해야 합니다.
성 프란치스코가 바로 그런 분이셨습니다.
십자군이 이슬람을 적으로 규정하고 정벌하러 갈 때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의 자녀요 우리의 형제인 이슬람 사람들에게
자기가 알고, 믿는 하느님을 전해주러 갔고
자기가 살고 있는 복음을 전해주러 갔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이슬람에게 가는 형제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사라센들과 다른 비신자들에게 가는 형제들은
그들 가운데서 두 가지 방법으로 영적으로 지낼 수 있습니다.
한 가지의 방법은 말다툼이나 논쟁을 하지 말고
하느님 때문에 모든 인간에게 복종하고
자신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일입니다.
또 다른 방법은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일이라고 볼 때에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여 그들로 하여금 전능하시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시며,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느님을 믿도록 하고,
구세주요 구원자이신 아드님을 믿도록 하여
그들이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하는 일입니다.”(미인준16장)
이렇게 이슬람에 갔었기에 순교를 무릅쓰고 갔건만
술탄은 오히려 프란치스코에게 감탄을 하여
선물을 주어서 돌려보냅니다.
틀림없이 아무런 적의 없이 형제에게 가장 좋은 것,
즉 하느님과 복음을 전하고자 한
그의 형제적 사랑을 만났기에 그랬을 것입니다.
구별 없는 그의 형제적 사랑이 모든 적개심을 무장 해제시키고
고마운 형제로 받아들이게 한 것입니다.
지난 목요일에는 밤 등산을 갔습니다.
길을 가는데 모든 사람의 관심사였던 양궁을 중계하고 있었습니다.
애써 듣지 않으려 했는데도 결과를 듣게 되었습니다.
우리 아이가 지고 중국 아이가 이겼습니다.
산을 오르는 동안 못마땅한 기분이 내내 가시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저 자신을 보니 한심스러웠습니다.
얼마나 도를 더 닦아야,
얼마나 프란치스칸으로 더 살아야 네 나라 내 나라 구분하지 않고
누가 이겨도 좋게 될까?
옛날 지역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제 고향을 버렸던 것처럼
이제 편협한 민족-국가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우리나라를 버려야하겠다,
내가 믿고 있는 천주교도 버려야하겠다 마음먹었습니다.
그러면 오늘 복음에서 가나안 여인을 주인집 강아지 취급하시며
당신은 이스라엘만을 위해 왔다고 하신 주님의 속뜻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민족적, 종교적 구별을 하시는 것일까요?
그런 것처럼 보이지만 그런 것이 전혀 아닙니다.
주님은 가나안 여인의 겸손과 믿음을 믿었던 것입니다.
이토록 무시를 하고 무안을 주어도
주님의 좋으심과 사랑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지 않을 것임을 믿으신 것이고
더 굳건해지도록 믿음을 흔드신 것입니다.
그리고 흔들어도 흔들리지 않는 가나안 여인의 믿음을
제자들이 보게 함으로 제자들을 부끄럽게 하고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시기하게 하고
믿음에 있어서 분발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느님께서 뽑으신 이스라엘이
참 신앙을 이방인에게 전해주어야 하는데
주님께서는 이방 여인을 통해서 이스라엘에 참 신앙을 일깨우시고
분발케 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는 주인집 자식으로 아쉬움 없이 모든 은총을 받았는데
주인집 강아지처럼 떨어지는 부스러기만 얻어먹는 이방 여인보다도
신앙이 작다는 말이냐
한 편으로는 꾸짖으면서
한 편으로는 제자들 약을 올리며 제자들에게 도전하시는 것입니다.
겸손과 믿음으로 더욱 굳건해 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