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
우리는 하느님이 은총의 하느님이시라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는 하느님께서 많이 주시고 맡기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만큼 더 청구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렇게 주신 것만큼 요구하신다면
그런 하느님을 은총의 하느님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은총이란 거저 주시는 선물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요구하시는데도 하느님이 여전히
은총의 하느님이시기 위해서는 요구하시는 것이
당신을 위한 요구가 아니라 다른 요구여야 합니다.
우리는 뭐를 줄 때 대가를 바라고 주는 것이 보통이고,
사랑을 줄 때도 사랑을 바라든 다른 뭘 바라든 바라고 주지요.
그래서 우리가 주는 많은 것들은 대부분 뇌물입니다.
사랑이라고 주면서도 뇌물사랑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주시는 것은 뇌물이 아니라 은총입니다.
부족함이 없으시고 삼위의 상호사랑으로 만족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만족을 구하시지도 당신을 위해 뭘 바라시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바라시고 요구하시는 것은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부모가 우리에게 바라는 것은 당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것인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운동하기를 부모가 바라고 요구하시는 것은
우리를 위한 것이지 결코 당신을 위한 것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우리를 위해 바라는 또 다른 차원이 있습니다.
집사로서의 역할인데 이것을 다시 가정에 대입을 하면
부모가 자녀들에게 서로 사랑하기를 바라고 요구하는 것이고,
형제 중에서도 장남에게 동생들을 맡기며 잘 돌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하느님께서 맡기시는 것을 좋아할 사람이 별로 없을 것 같고,
그래서 맡기신 것을 맡는 사람도 별로 없을 것 같습니다.
더군다나 맡긴 다음에 더 많은 청구하신다고까지 하시면
아무도 맡으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네 마음대로 하라고 권력을 주고 책임을 맡으라면
정치인들이 서로 하려고 하는 것처럼 맡을 사람이 많겠지만
당신이 하라는 대로 하고 그렇지 않으면 벌주겠다고 하시며
책임을 맡으라면 요즘 누가 그 책임을 맡으려 하겠습니까?
그러니 오늘 복음은 요즘 사람들에게 시대착오적입니다.
그러면 하느님이 시대착오적이시니 오늘 복음을 묵살해도 되겠습니까?
하느님을 믿지 않는 우리라면 그렇게 해도 되고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 우리라면 아무리 하라 하셔도 묵살할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 다시 은총과 책임 문제로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많이 주신 것은 은총이고
많은 것을 맡기셨다는 것은 책임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은총을 주심은 편애,
곧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사랑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흔히 큰 책임을 주어졌을 때 힘이나 능력이 부족하다고 하고,
그때 우리는 책임을 맡기시는 분이 그 일을 할 힘과 능력을 주실 거라고
격려하는데 바로 그런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맡기신 책임을 책임감을 가지고 잘 수행할 수도 있지만
우리는 은총의 힘으로 잘 수행하고 영적으로 수행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