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졌던 것을 포기하고 수도원에 들어왔지만,
어느 순간 무엇인가 움켜쥐려는
제 모습을 보곤합니다.
물론 물질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조금은 덜 하지만,
오히려 다른 부분에 대해서
저도 모르게 움켜쥐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수도자로, 사제로 살다보니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를 해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지금과 같은 복음 묵상 나눔입니다.
이야기를 하다보면
그 이야기는 어떻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끝이 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그 바람은 저에게 해당되기도 합니다.
즉 저도 앞으로 그렇게 살아가도록 노력하겠다는 의미가
그 안에 있습니다.
그러면서 듣는 분들이 함께 그렇게 살았으면 하는 바람도
그 안에 있습니다.
저 자신에 대한 다짐으로 끝나면 좋은데,
다른 사람들에 대한 바람도 있다보니
기대에 대한 실말을 하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더욱이 이것은 저 자신도 꼭 하고
다른 사람도 꼭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일수록,
듣는 사람들이 저와 친분이 있는 사람일수록,
변화에 대한 기대가 더 크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물론 변화라는 열매는 맺어집니다.
우리 각자의 노력과 하느님의 은총이 함께 작용해서
그 열매가 맺어지는데,
다른 사람들 안에서 맺어지는 그 열매를
빨리 보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열매를 맺을지 아닐지,
아니 얼마나 빨리 맺을 수 있는지는
각자에게 맡겨진 것인데,
그 열매를 제 것으로 움켜쥐고 싶다보니,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변화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화를 내는 제 모습을 보곤 합니다.
제가 이야기하는 말이 공허한 외침이나
벽에 대고 하는 말이 아니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누군가 제 말을 통해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것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변화의 열매를 제 것으로 하려는 순간,
누군가에게 조금이나마
변화가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하는 순간,
하느님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저 자신을 드러내는 행동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바로 그 지점이 한계인 것 같습니다.
사람들의 칭찬이나 변화를 보지 않으면서도
꾸준히 하느님에 대해서 이야기 하기가
쉽지는 않다고 느껴집니다.
하느님 나라의 보물,
그 영원한 생명,
다시 말해서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기쁨이
그것에 대한 유일한 보상이라고
오늘 복음은 이야기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서 오는 칭찬이나 보상을
포기할 수 있을 때,
그 기쁨을 더 크게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쉽지 않지만
오늘 또 다시
그 가난에 대해서,
그리고 그것을 채워주시는 하느님에 대해서
생각해 봅니다.
어느 순간 무엇인가 움켜쥐려는
제 모습을 보곤합니다.
물론 물질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조금은 덜 하지만,
오히려 다른 부분에 대해서
저도 모르게 움켜쥐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수도자로, 사제로 살다보니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를 해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지금과 같은 복음 묵상 나눔입니다.
이야기를 하다보면
그 이야기는 어떻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끝이 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그 바람은 저에게 해당되기도 합니다.
즉 저도 앞으로 그렇게 살아가도록 노력하겠다는 의미가
그 안에 있습니다.
그러면서 듣는 분들이 함께 그렇게 살았으면 하는 바람도
그 안에 있습니다.
저 자신에 대한 다짐으로 끝나면 좋은데,
다른 사람들에 대한 바람도 있다보니
기대에 대한 실말을 하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더욱이 이것은 저 자신도 꼭 하고
다른 사람도 꼭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일수록,
듣는 사람들이 저와 친분이 있는 사람일수록,
변화에 대한 기대가 더 크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물론 변화라는 열매는 맺어집니다.
우리 각자의 노력과 하느님의 은총이 함께 작용해서
그 열매가 맺어지는데,
다른 사람들 안에서 맺어지는 그 열매를
빨리 보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열매를 맺을지 아닐지,
아니 얼마나 빨리 맺을 수 있는지는
각자에게 맡겨진 것인데,
그 열매를 제 것으로 움켜쥐고 싶다보니,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변화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화를 내는 제 모습을 보곤 합니다.
제가 이야기하는 말이 공허한 외침이나
벽에 대고 하는 말이 아니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누군가 제 말을 통해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것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변화의 열매를 제 것으로 하려는 순간,
누군가에게 조금이나마
변화가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하는 순간,
하느님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저 자신을 드러내는 행동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바로 그 지점이 한계인 것 같습니다.
사람들의 칭찬이나 변화를 보지 않으면서도
꾸준히 하느님에 대해서 이야기 하기가
쉽지는 않다고 느껴집니다.
하느님 나라의 보물,
그 영원한 생명,
다시 말해서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기쁨이
그것에 대한 유일한 보상이라고
오늘 복음은 이야기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서 오는 칭찬이나 보상을
포기할 수 있을 때,
그 기쁨을 더 크게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쉽지 않지만
오늘 또 다시
그 가난에 대해서,
그리고 그것을 채워주시는 하느님에 대해서
생각해 봅니다.
고맙습니다~!!!
신부님의 그 마음또한 하느님에대한 사랑에서 오는것이리라 감히 묵상해봅니다.
늘 신부님의 강론을 들으며 용기를 갖고 살아가는 미카엘라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