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모세가 그런 계명을 너희에게 남긴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이혼장을 써주라는 모세의 계명이 맞는 것인지 바리사이들이 묻자
주님께서는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모세가 그리 한 것이니
그래서는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이에는 이, 칼에는 칼’이라는 동태복수도 주님께서는 안 된다고 하셨는데
동태복수법이 자기가 당한 이상으로 복수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생겼으니
이 법도 사실은 좋은 의도의 법이지만 그래도 본래 하느님 뜻은 아니라는
말씀이고 오늘 말씀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번역은 완고함이라고 하였지만 개신교 번역의 완악함이 더 낫다고
저는 생각하는데 완고할 뿐 아니라 악하여 제 멋대로 아내를 버리는
당시 사람들과 그것을 문제시하지 않는 바리사이들을 비판하시는 겁니다.
여기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이렇게 완악한 인간, 인간 중에서도
상대적으로 더 완악한 편인 남성이 자기중심으로 소유도 하고 버리기도
해서는 안 되고 하느님의 거룩한 뜻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거지요.
그렇다면 하느님의 거룩한 뜻은 무엇입니까?
당신이 짝지어주신 거면 싫어도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까?
남편이 매일 두들겨 패고, 심지어 칼을 듣고 죽이려고까지 하는데도?
그것은 너무도 분명하지 않습니까?
미워하지 말고 사랑하라는 것이요,
버리지 말고 데리고 살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기본적인 태도가 중요합니다.
마음에 들면 데리고 살고 싫으면 차버리려는 마음가짐은 안 되고,
하느님께서 이 짝을 내게 주신 것은 사랑하라고 주신 것이기에
점차 사랑을 완성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루려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그러기에 이때 제일 중요한 것이 내 짝이 내가 선택한 짝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짝으로 받아들이는 성사적인 자세인데 그런데
성사란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요 하느님이 발생하는 것이잖아요?
잘 아시다시피 커피 한 잔을 마셔도
성사적으로 마실 수 있고 기호적으로 마실 수 있지요.
어떤 사람은 그저 커피의 맛과 향을 즐기며 마시지만
사랑을 하는 사람은 혼자 마셔도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할 것이요,
차 한 잔을 마셔도 같이 마시고 싶어 하고 그래서 같이 마십니다.
그런데 커피와 나만 있는 사람,
커피와 애인과 내가 있는 사람,
커피와 애인과 하느님과 내가 있는 사람, 이 중에 누가 가장 성사적입니까?
요즘 혼족이 참으로 많습니다.
혼인을 한 족속이 많은 것이 아니라
혼자인 족속이 많다는 얘깁니다.
그런데 혼자서는 절대로 하느님께 올라갈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세 분이서 하나인 사랑의 하느님이시기에
혼자서 하나인 사람은 이 사랑에 참여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제가 자주 하는 얘기 중의 하나가 계단을 밟아 단계에 오른다는 겁니다.
첼라노는 프란치스코가 피조물을 사다리삼아 하늘로 올라갔다고 하는데
프란치스코는 분명 사람과 어울리지 못해 반려견과 사는 요즘 사람처럼
인간사랑을 통하지 않고 피조물을 통해 하느님께 오르지 않았을 겁니다.
인간사랑의 여러 계단을 밟아 하느님 사랑의 단계까지 오르라는 것이
우리의 부르심이요 소명임을 다시 한 번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저의 모든 관계를 살펴보는 주일 아침입니다. 로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