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어제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서 두 번째 경우, 바위에 떨어진 씨는
한 때 믿다가 시련의 때가 오면 떨어져나가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실제로 우리 신앙생활의 경험을 보면 세례를 받고 난 뒤
집안에 우환이나 환난이 생기는 경우가 꽤 있고 그로 인해
신앙이 흔들리거나 그만 두는 사람들이 적잖이 있습니다.
또 수도원에서도 서원을 앞두거나 서품을 앞두고
부모형제에게 시련이 닥치는 경우가 꽤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하느님을 믿으면 더 좋은 일만 있고,
남들보다 더 잘 살게 되며
남들보다 더 성공하고 높아질 거라고 믿었는데
어찌 그 반대냐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에 대해 오늘 독서와 복음은 답을 줍니다.
세상 사람은 이 세상에서 남보다 더 잘 살고,
더 성공하고 높아져 남위에 군림하려고 하지만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오르려는 사람은 다 내려놔야 합니다.
오르려면 무게를 줄여야하고 이 세상 것은 다 내려놔야 합니다.
부귀영화, 지위, 자존심, 주장, 고집 같은 말할 것도 없고
근심걱정, 불안, 두려움, 이런 것들도 다 내려놔야 합니다.
왜냐면 근심걱정이나 불안 두려움도 다 세상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고 주님의 종으로서 살아가는 것은
이 세상에서 잘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늘에 오르기 위해서고,
하늘로 오르기 위해서는 오늘 우리의 주님처럼
파스카의 수난과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데 여러 번 제가 얘기하듯
이 세상에서 최악을 각오하면 오히려 모든 것이 선이 되면서
두려울 것도 불안해할 것도 없으며 근심걱정은 더더욱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최악, 그러니까 수난과 죽음을 각오하기만 하면 되는데
그 말이 맞다 생각하고 말로 하는 것은 쉽지만 그 각오하기가 쉽지 않지요.
그런데 그것이 왜 쉽지 않습니까?
제 생각에 그것은 수난과 죽음이 파스카의 수난과 죽음이 아니기 때문이고
파스카 의식이 부족하고 파스카 의지가 약하기 때문입니다.
맞이할 것이 그저 수난과 죽음뿐이라면 누가 그것을 각오하고
그뿐이라면 누가 수난과 죽음을 기꺼이 맞이하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의 고통을 불평하며
차라리 이집트로 돌아가는 것이 낫다고 한 것은 광야에서 유랑하는 것이
고생스러워서 그런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가나안을 향해 가고자 하는
의지가 약했기 때문이고 가나안을 향해 가고자 하는 의지가 약했던 것은
가나안이 행복의 땅이라는 믿음과 갈 수 있다는 희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민수기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반란을 일으켜 이집트로 돌아가려한 것은
가나안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때가 아니라 오히려 가나안에 가까웠을 때고
정찰대를 보내어 가나안에 대한 보고를 듣고 난 뒤
갈 수 있다는 희망이 꺾이면서 갈망도 의지도 꺾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의 제자들도 지금 예수님과 자기들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이
파스카의 수난과 죽음의 행진 중이라는 것을 알았더라면
권력다툼을 하지 않았을 것이고 이 세상 것을 다 내려놓았을 겁니다.
그러므로 저는 오늘 결론처럼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내려놔야 오를 수 있지만
오르고자 할 때 내려놓고
오르고자 할 때 이 세상에서의 수난과 죽음을 기꺼이 맞이하게 될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