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께서는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라고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이 일을 말재주로 하라는 것이 아니었으니,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오늘도 여느 때처럼 독서와 복음을 차례로 읽는데 끝까지 다 읽긴 읽었지만
독서의 첫 구절에서 걸려 읽고 또 읽고 이 뜻이 뭘 지 계속 묵상했습니다.
세례를 주라고 주님께서 자신을 보내신 것이 아니라고
바오로 사도가 얘기하는데 뭔 뜻인지 이해가 바로 되지 않아서입니다.
세례를 주지 말라는 뜻입니까, 주지 않아도 된다는 뜻입니까?
세례가 복음보다 부차적인 거라는 뜻입니까,
세례와 복음이 서로 대립되는 거라는 뜻입니까?
부차적이거나 대립된다면 여기서 말하는 세례는 무엇입니까?
그래서 도대체 무슨 뜻인지 알기 위해 오늘 독서의 앞부분을 보니
그 뜻이 금방 나왔습니다.
당시 코린토 교회는 분열과 파벌다툼이 심했습니다.
나는 게파에게 세례를 받았다느니, 아폴로에게 세례를 받았다느니 하며
사분오열되었고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전서 내내 이를 걱정하며
12장에서는 신자들이란 주님의 몸을 같이 나누는 사람들임을 얘기하고
13장에서는 그 유명한 사랑의 찬가를 설파하고 있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성과는 별로 없지만 선교를 끊임없이 생각하고 얘기하는 저는
그래서 오늘 독서를 묵상하며 세례와 복음 선포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성찰을 하게 됩니다.
언젠가도 얘기한 적이 있는데 저의 부끄러움 중의 하나는
저로 인해 세례 받은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군 제대하고 꽤 시간이 지난 뒤에 저의 조수였던 친구가 엽서를 보내왔는데
저로 인해 세례 받았다며 감사를 표한 것이 제가 아는 유일한 사례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저의 부끄러움이며 열등감이기도 하지만
그렇지만 여전히 저는 복음을 나누지 세례를 주고자 하지 않습니다.
세례를 받으라거나 천주교를 믿으라고 적극 권하지 않는다는 얘깁니다.
고집이랄까 자존심 때문인데,
천주교 교세 확장이라는 욕심 때문에 세례를 받으라고 한다면
그것 역시 코린토 교회나 마찬가지로 파당적인 세력 확장일 뿐이기에
세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며,
또 하나는 제가 진정 복음을 잘 선포하였으면 스스로 세례를 받을 텐데
스스로 세례를 받지 않는다는 것은 제가 복음을 잘 살지도 못하고
선포하지도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복음 선포는 사랑으로 하는 것이어야지 욕심으로 하는 것이어서는 아니듯
세례를 받는 것도 또 주는 것도 사랑이어야 하지 욕심이어서는 안 되지요.
그렇습니다.
그러나 제가 이렇게 얘기하지만 저 자신을 반성하면
저의 복음 선포가 세례로 이어지지 않은 것은
욕심이 아니라 사랑으로 복음 선포를 해야 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욕심으로 복음을 선포하였거나
욕심으로 하지는 않았지만 사랑으로 선포하지 않았거나
사랑이 미약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실 약한 불이나 때다 만 불로는 냉골이 온돌이 될 수 없겠지요.
당파심 다시 말해서 파당을 지으려는 마음이 있는 것도 문제지만
복음을 전하려는 뜨거운 마음이 없는 것도 문제임을 반성하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