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저만 그렇게 생각지 않고 여러분도 그런 생각이 드셨을 텐데
왜 베드로 사도는 공연히 물을 걸으려고 했을까요?
아니, 물을 걸으려는 생각이었으면 주님께 청하지 않고
자기 스스로 걸어갔으면 되지 왜 주님께 오라고 명령해 달라 청했을까요?
그리고 다른 복음에는 없는데 왜 마태오복음은
물 위를 걷는 베드로 얘기를 제자들의 풍랑 경험 사건에 집어넣었을까요?
이렇게 의문을 가지고 오늘 복음을 보니
베드로가 물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해주실 것을 주님께 청한 것이
전혀 뜬금없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부추기신 것이란 생각까지 듭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용기를 내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바로 다음에 베드로가
물위를 걸어오라는 명령을 해 달라고 청합니다.
그러니 용기를 내라고 하셨는데 무슨 용기를 내라는 것이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뭘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겠습니까?
물 위를 걸어오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용기 내라고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친히 말씀하지는 않으셨어도 베드로가 그리 알아들은 게 아니겠습니까?
오늘 복음 전체를 보면 그럴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주님께서는 일부러 제자들끼리만 가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돌려보내신 다음 곧바로 뒤따라가지 않으시고
산에 올라가 기도하신 뒤에 늑장부리며 제자들에게 가셨습니다.
풍랑을 겪을 것을 아시고도 제자들이 풍랑을 겪게 하신 것이고,
당신은 늑장을 부리신 거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풍랑을 겪도록 내버려두시고,
거기서 최대의 두려움 체험을 하게 하십니다.
성서학자들 중에는 네 복음서에 모두 나오는 얘기들,
곧 빵의 기적과 풍랑을 잠재우신 기적 얘기는 실제 사건이 아니라
우리 인생사에서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들 중에서
중요한 일들에 대해 교훈을 주기 위해 만든 얘기라고 하는데
주님 없이 바다를 건너다 풍랑을 만나는 얘기는 우리 인생도
바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가는 중에 인생이 완전히 뒤집힐 정도의
시련을 꼭 만나게 된다는 것을 얘기로 만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에는 적어도 한 번 우리 인생이 완전히 뒤집히는 일이 벌어지고,
하느님께서는 그런 일이 우리에게 생기는 것을 막아주지 않으시며,
그 일이 벌어졌을 때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우리 부모들이 자식들을 아무리 사랑해도 풍랑까지 막아주지 못하듯
하느님께서도 아무리 우리를 사랑하시고 부모보다 더 사랑하셔도
인생의 풍랑은 막아주지 못하시고 막아줄 생각도 없으십니다.
인생의 풍랑은 유한한 인간 삶의 거대한 조건이고
구원과 행복을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문입니다.
이 엄청난 조건을 채우고 난관을 통과할 때 우리는 인간으로서
풍랑을 겪어내고 이겨낸 어른이 되고 성숙한 인간이 되는 것이며,
신앙인으로서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과 믿음을 갖게 될 뿐 아니라
하느님과 함께 풍랑에 대해 잠잠해지라고 호령할 수 있게 됩니다.
풍랑을 만났을 때 우리 중의 누구는 베드로처럼 그 두려워하던
풍랑을 딛고 주님께 가는 용기를 낼 것이고,
우리 중의 누구는 그 정도의 용기가 없어 가지 못하니
주님께서 오셔야 한다고 하며 자기 배 안에 주님을 모실 테지만
어쨌거나 우리 배에는 주님이 계셔야 풍랑이 가라앉습니다.
제 안에 밀려오는 물결이 예감되는 오늘,
제게는 주님이 꼭 계셔야 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