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오늘은 주님을 따름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따름에 대해 묵상합니다.
우리는 어디를 가려고 하는데 길을 모를 경우
그 길을 아는 사람을 찾고 아는 사람이 있으면
그가 알려주는 대로 가거나 그가 자기를 따르라고 하면 그를 따라갑니다.
그제와 어제는 선교 학교에 강의가 있어서 한남동 피정의 집에 갔는데
어제 아침 피정의 집 뒤에 있는 매봉산을 올랐습니다.
여기서 교육이 있을 때마다 올랐기에 가던 길로만 가면 문제가 없는데
다른 길로 가도 되지 않을까 하고 갔다가 그만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저 혼자라면 이 길도 가보고 저 길도 가보면서 길을 찾겠지만
뒤에 여러 사람이 있기에 그럴 수 없어서 그 동네 분에게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분이 친절하게 자기를 따라오라고 했고,
방향이 달라 길이 갈리는 곳에서는 길을 알려주어 무사히 돌아왔습니다.
참 고맙지요.
그분이 없었다면 우리 10여 명이 고생을 많이 했을 텐데.
그런데 고생을 하는 정도를 넘어 생사가 갈리는 길에서
길을 모르고 알려주는 사람도 없으면 얼마나 큰 문제이고,
반대로 알려주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다행이고 얼마나 고맙겠습니까?
그러나 그분이 고마운 분이긴 하지만 저는 그분과 헤어졌습니다.
저는 제 가는 곳이 있고, 그분은 그분의 가는 곳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더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그분과 저는 가는 곳이 달라서 나중에는 그분을 따라가지 않았지만
혹 가는 곳이 같아서 끝까지 따라갔어도 실은 그를 따른 것이 아닙니다.
무슨 뜻입니까?
그분을 따라갔지만 내가 가는 곳을 가기 위해 그분을 따라간 거지
그분을 따라간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분 목적지와 제 목적지가 같아서 따라간 것뿐이라는 뜻이고
그분이 제 목적이 아니고 내 갈 곳이 제 목적지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사랑할 경우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랑하는 경우는 따로 나의 목적지가 없습니다.
나의 목적지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곳입니다.
이런 뜻에서 오늘 바리사이는 말로만 놓고 보면 참 훌륭하다 하겠습니다.
그는 주님이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겠다고 하였지요.
어디가 목적이 아니고 주님이 목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대단한 율법학자에게 주님께서는 왜 이상한 답을 하실까요?
율법학자가 당신을 따르겠다고 할 때 주님이 그 따름을 허락했다는
그런 얘기는 없고 따르면 생고생을 할 거라는 얘기만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고생이 심하니 따르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고생을 하더라도 따르고자 하면 따르라는 말씀이지요.
그렇습니다.
좋아서 따라가는 것은 고생이 없지만
사랑하여 따라가는 것은 고생이 많고
그 고생을 각오하고 따라가야 합니다.
그리고 고생을 할수록 더 사랑할 수 있을 때 따라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따라나섰다가 생고생만 하고 실패하겠지요.
그러니 심사에 숙고를 하라는 말씀인데
우리는 늘 우리의 사랑이 어느 정도고 어떤 사랑인지
잘 성찰하고 잘 알아야 함을 생각하게 되는 오늘입니다.
반갑습니다.
신부님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