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인생이 이미 정해져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
우리는 그런 인생을 운명이라고도 하고 팔자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어떤 때 이런 운명이랄까 팔자를 느낍니까?
행복할 때, 하는 일이 술술 잘 풀릴 때 느낍니까?
아니지요. 나는 이렇게 하려는데 저렇게 되는 일이 반복될 때
내 뜻대로 안 되는 그런 인생을 우리는 그것이 나의 운명이기에,
그것이 나의 팔자이기에 그런 거라고 생각하고 심지어 믿게 되는 거지요.
그래서 다 ‘팔자소관’이라는 말이 있고 ‘팔자가 사납다’는 말도 있지요.
그런데 운명이랄까 팔자는 다 안 좋은 쪽으로 정해진 겁니까?
어떤 사람은 행복할 운명이고 어떤 사람은 불행할 팔자입니까?
모든 것이 운명이고 그 운명을 내가 개척할 수는 없는 것입니까?
운명론에 해당하는 그리스도교의 이론이 예정론 또는 예정설입니다.
인간의 운명/구원은 정해졌는데 하느님에 의해 정해졌다는 것인데
태어나기 전부터 은총으로 선택 받아 구원이 예정되어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는 극단적인 예정설에서부터
하느님 은총의 선택과 우리 인간의 선택과 응답이 조화를 이루어
구원을 받는다는 조화 예정설까지 여러 예정설이 있지요.
그런데 오늘 세례자 요한의 축일을 맞아 이 얘기를 길게 하는 것은
무슨 뜻이고 이 축일과 무슨 상관이 있는 것입니까?
오늘 축일의 독서가 “그분께서는 이스라엘이 당신께 모여들게 하시려고
나를 모태에서부터 당신 종으로 빚어 만드셨다. 나는 주님의 눈에 소중하게
여겨졌고 나의 하느님께서 나의 힘이 되어 주셨다.”고 얘기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종이 될 운명,
좀 좋게 바꾸어 얘기하면 주님의 선구자와 준비자가 될 운명입니다.
자기 운명이 아니고 주님을 위한 운명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만일 제가 저를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해 태어난 것이라면 이것은 뭡니까?
복입니까, 화입니까? 영광입니까, 비참함입니까? 은총입니까, 벌입니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의 운명이 하느님에 의해 정해졌다는 것이 싫어
내 인생은 나의 것이고, 나는 누구를 위해 태어난 것도 사는 것도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사랑을 모르는 사람이고 신앙인도 아닙니다.
개신교건 천주교건 신앙인이 공통적으로 믿어야 할 예정설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의 예정설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우리는 사랑하도록 운명 지어진 존재라는 겁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운명이기도 합니다.
어미의 운명이 사랑의 운명이니 어미보다 더 사랑하시고
아예 존재가 사랑이신 하느님의 운명도 사랑의 운명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도 육화하시고 죽으셔야 했으며
세례자 요한도 마찬가지의 운명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인간 누구에게나 보편적인 사랑의 운명이라면
인류구원의 역사에 필요한 특별한 사명의 운명도 있습니다.
마리아나 요셉이나 세례자 요한과 같은 분들의 운명이
바로 구세사에 필요한 특별한 사명의 운명이며
그중에서도 세례자 요한은 주님의 선구자, 준비자, 지시자,
세례자의 운명으로 태어났다고 오늘의 감사송은 노래합니다.
“아버지께서는 복된 요한을 뽑으시어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특별한 영예를 주셨으니 그리스도의 선구자 요한은 모든 예언자 가운데에서
그 홀로 속죄의 어린양을 보여주었나이다. 또한 그는 세례의 제정자 주님께
세례를 베풀었으며 피를 흘려 주님을 드높이 증언하였나이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만이 이런 사명의 운명이 아닐 겁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의 사명의 운명을 살라고 오늘 그의 축일을 지내는 겁니다.
하여 우리는 2천 년이 지난 오늘의 세례자 요한들임을 생각하는 오늘입니다.
들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대박난 운명 사건으로 땅에 엎드려야 할 이몸 이옵니다. 주님을 찬미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