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아예 맹세하지 마라.”
“너희는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요’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
주님께서는 왜 맹세하지 말라고 하시는 걸까요?
그리고 왜 ‘예-아니요’만 하라고 하시는 걸까요?
첫째 이유는 맹세할 수 있는 주제가 아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런 뜻에서 주님께서는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라도
희거나 검게 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맹세는 미래의 나의 실행에 대한 의지 표출이고
그러니 반드시 실행될 것이라는 나의 말을 믿어달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지금 맹세한다고 미래에 그렇게 될지 알 수 없습니다.
우선 우리의 의지 자체를 믿을 수 없습니다.
작심삼일처럼 우리의 의지가 약하기 때문에도 믿을 수 없지만
약하지 않더라도 우리의 마음은 변할 수 있습니다.
영원히 사랑할 것이라고 맹세하지만 사랑이 변하지 않습니까?
지금은 반드시 하겠다고 생각하지만 그 마음이 변하지 않습니까?
피정을 할 때는 마음을 굳게 먹지만 그 마음이 변하지 않습니까?
베드로 사도가 주님의 수난 예고 때 같이 죽겠다고 맹세하고,
제베데오 아들들도 수난의 잔을 같이 마시겠다고 하였지만
상황이 바뀌니까, 곧 어려움이 닥치니까 다 배반하였지요.
그러니 우리는 미래의 나와 나의 행동에 대해서 겸손해야 합니다.
왜냐면 맹세하실 수 있는 분은 하느님 한 분뿐이시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지금과 영원히 변치 않으실 분 하느님뿐이시고,
맹세한 대로 하실 수 있는 분은 하느님뿐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은 미래를 보장할 수 없고
더욱이 영원을 보장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젊었을 때의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늙었을 때의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수 있고,
주변 상황도 지금과는 너무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러니 내가 어찌 하겠다고 미래를 그것도 영원히 보장하지 말고
그저 겸손하게 지금 그것을 할 것인지, 말 것인지 말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맹세를 하지 말아야 할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할 수 있는 맹세만 하라하지 않으시고 아예 맹세치 말라
하시는데 그 이유가 맹세하는 것 자체가 악이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맹세가 왜 악에서 나오는 것입니까?
제 생각에 그것은 위선과 마찬가지로 선할 것이 없는 나인데
나를 선한 나로 믿어달라는 것이고,
심하게 얘기하면 남을 속이기 위해서 맹세하는 것이기 때문이며,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맹세의 심리는 악한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 말씀대로 ‘예’ 할 것이면 ‘예’ 하고
‘아니오’ 할 것이면 ‘아니오’라고 하면 되는데
자신의 말을 믿지 않을까봐 그래서 믿게 하려고 맹세까지 하는 것이지요.
약국의 약사는 약의 효능이 이렇다 또는 저렇다만 얘기하고
길거리 약장수가 가짜 약을 믿게 하려고 감언이설로 속이는 법이지요.
맹세의 심리는 선거 때만 되면 자신이 천주교 신자입네 하는 것과 같이
하느님을 믿는 자신을 믿어달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을 진실하게 믿는 사람이라면 그저 신자답게 살면 되는 것이지
신자라는 것을 굳이 내세울 필요가 없잖아요
위악하지 않고 위선하는 것이 인간이고
나 자신이라는 것을 항상 경계할 것입니다.
아버지께 맡겨 드립니다
이끌어 주소서.
대전지구형제회 밴드회원중 60~70명이 신부님의 강론말씀으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저는 말씀을 밴드로 옮겨주는 배달꾼입니다. 배달꾼으로시 감사드리며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