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아들의 일치는
믿음을 통하여 제자들의 일치로 확장되고
더 나아가 제자들의 말을 듣고
아들을 믿게 된 이들의 일치로까지 확장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치는
제자들만의 일치나,
후대 사람들만의 일치에 머물지 않고,
아버지와의 일치 속으로 포함됩니다.
즉 믿음을 통해 일치의 범위가 점점 더 커져갑니다.
그리고 그 일치는
아들을 통해 아버지를 알게 되면서,
더 나아가 아버지의 이름을 알게 되면서,
그리고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에 파견하셨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가능해집니다.
모세 이후로 구약에 나타난 하느님 모습의 특징은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서은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을 직접 뵙는 것을 두려워하게 되고,
그 이후로 하느님을 직접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하느님은 항상 베일에 싸여 계신 분,
잘 모르기에 더 두려운 분으로 생각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만큼 하느님과 인간의 거리는
좁힐 수 없는 일정한 간극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들을 통해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세상에 드러내셨습니다.
하느님은 더 이상 저 하늘 위에서
무서운 군주로 군림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 곁에서 희노애락을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으로
다가오셨습니다.
하느님을 알게 되면서,
하느님께서 함께 하심을 알게 되면서,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고
하느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의 최종 목표는
하느님과의 온전한 일치임을
오늘 복음은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느님을 아는 것
그 앎을 통해 하느님과 일치하는 것을
3절은 영원한 생명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서로 다른 사람이 한 마음이 되어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위해서 이 삶을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이 삶은 그만큼 복된 삶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 복된 삶을 진정 복되게 살아가려면,
우리는 끊임없이 하느님이 누구신지
알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 노력을 멈춘다면,
우리는 우리 방식대로 일치를 이루려고 노력할 것이며,
그것은 일치가 아닌 획일화로 갈 것입니다.
우리 삶의 중심에 하느님이 계시는지
다시 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하느님은 어떤 모습으로 계시는지
확인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러한 작업을 통해
하느님 안에서 참된 일치의 공동체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