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독서와 복음은 바오로 사도와 주님께서 각기 자신의 생애를
마감하는 시점에서 자신이 어떻게 했는지를 술회하는 내용입니다.
사실 생애의 마지막으로 죽는 것 외에 자신이 더 할 것이 없으니
지난 날 자신이 어떻게 했는지 돌아보고 술회하는 것이 대부분이겠지요.
프란치스코의 유언만 봐도 전반부는 과거회고이고 후반부는 당부이듯이
생애의 마지막에 가면 누구나 이렇게 과거를 회고하고
그런 다음 당부할 것은 당부하는 것이 보통이지요.
그런데 두 분 다 과거회고를 하면서 해야 할 바를 다했다고 자신합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엄숙히 선언합니다. 내가 하느님의 모든 뜻을
무엇 하나 빼놓지 않고 여러분에게 알려 주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서 저에게 하라고 맡기신 일을 완수하여,
저는 땅에서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맡기신 일을 다 완수했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우리가 수긍을 할 수 있는데 바오로 사도가 하느님의 뜻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다 알려줬다고 하는 것은 너무 지나치지 않나 생각이 듭니다.
그것은 주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니까 그럴 수 있지만
바오로 사도가 아무리 훌륭하고 또 열심히 자기 의무를 다하려했어도
한낱 인간일 뿐인데 자기 임무를 완수했다는 것은
너무 지나친 주장같이 들리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잘 생각을 해보면 이렇게 얘기하는 것이
자기 업적을 자랑하기 위한 것이고 그것도 자기 힘으로 해냈다고
떠벌리기 위한 것이라면 해서도 안 되고 할 수도 없는 얘기지만
이렇게 거리낌 없이 하는 것을 보면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일 것입니다.
내내 하느님의 일을 하느님의 힘으로 했다고 생각하는 것이고,
그랬기에 완수한 거라고 철석같이 믿기에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다음의 말입니다.
“그런데 이제 나는 성령께 사로잡혀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오로 사도가 곧 닥칠 자신의 미래를 얘기하는 것이지만
지나온 온 생애도 성령께 사로잡혀 뭣이건 한 생애였다는 말이지요.
사도행전에서 여러 차례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바오로 사도가
어디로 가려고 했는데 성령께서 막으셔서 가지 못했다거나
성령께서 인도하셔서 어디로 갔다고 하는 표현들인데 실은
사람들이 막거나 사람들이 와달라고 한 것인데도
성령께서 그렇게 하셨다고 믿고 그렇게 표현한 것이지요.
그런데 더 기가 막힌 것은 성령에 사로잡혀 한 것이
투옥되고, 돌로 맞고, 죽을 뻔하고, 뭐 다 이런 것들이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묻습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 고작 이런 겁니까?
하느님 영광을 위해 멋진 일을 성공적으로 완수케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하느님께서 성령을 시켜 주님과 우리가 완수하기를 바라시는 것은
어떤 일을 성공적으로 완수하는 것이기보다는
수난을 거부하지 않고 끝까지 완수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께서는 주님을 광야로 이끄셨고,
거기서 40일간 단식과 고행을 하게 하셨으며, 악령과 대면하게 하시고,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영광스럽게 증명해보이라는 유혹을 받게 하셨으며,
게세마니에서 피땀 흘리며 고뇌하게 하시고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다시
하느님의 아들이면 십자가 위에서 내려와 보라는 유혹을 받지만
끝까지 수난을 완수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완수해야 하고 바오로 사도와 우리가
완수해야 할 것은 수난과 십자가이지 부활이 아닙니다.
부활을 완수하는 것은 하느님 아버지이십니다.
복음 선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완수해야 할 것은
온갖 역경 중에서도 말씀의 씨를 뿌리는 것뿐이고
열매를 맺고 성공을 거두는 것은 하느님께서 하실 일입니다.
그러니 나이를 먹어 죽음을 향해갈수록
새로운 일을 도모하고 성공적으로 해낼 궁리를 할 것이 아니라
주어진 일과 주어진 병고를 감내하며 잘 죽을 궁리나 해야 할 것입니다.
이 말씀에 머무르는 오늘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