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네아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고쳐주십니다.
일어나 침상을 정돈하십시오.”
“다비타, 일어나시오.”
오늘 사도행전의 베드로 사도의 기적은 주님의 기적 사건의 판박이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애네아스를 고쳐준 것은 주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쳐주신 후
일어나 들것을 들고 가라고 하신 것의 판박이이고,
다비타를 살린 것은 죽은 소녀를 살리실 때
달리타 쿰(소녀야 일어나라)하신 것의 판박이입니다.
그래서 의심이랄까 의문이 생기기도 합니다.
오늘 사도행전의 기적들은 실제 사건이 아니라 지어낸 얘기가 아닐까?
그리고 이런 의문도 생깁니다.
베드로 사도는 주님 생전에는 기적이 없다가 왜 사후에야 기적을 일으킬까?
이에 대해 처음에 딱 떠오른 생각은 이것이었습니다.
해가 져야 달이 떠오르지!
해와 달은 참 묘한 관계입니다.
해가 없으면 달도 빛이 없지요.
그리고 해가 뜨면 달이 떠있어도 빛을 잃습니다.
그러기에 달은 해의 빛을 받아야만 빛을 지니지만
해가 지고 난 뒤에야 그 빛이 빛을 내기 시작합니다.
주님이 살아계실 때는 주님의 빛에 베드로 사도는 빛을 잃었습니다.
더 크고 밝은 빛에 작고 어둔 빛이 가렸다는 뜻만이 아닙니다.
너무도 큰 빛이 있으니 어떤 다른 빛도 필요 없을 뿐더러
그래서 그가 빛이 되어야 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영원할 것 같은 그 큰 빛이 사라졌습니다.
그 빛이 있을 때는 빛 가운데서 그저 즐기고 노닐며 좋아라만 했는데
갑자기 빛이 사라지자 어둠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한 동안 절망에 빠져 있었습니다.
빛이 있다가 갑자기 사라지면 정말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그래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과 같은 현상이지요.
그러나 그렇게 얼마 있으면 눈이 어둠에 적응하면서
이 어둠을 어떻게 밝힐까 생각하게 되듯이 베드로 사도도
어둠 가운데서 한 동안 지낸 다음에야 빛을 찾기 시작했고
그때 비로소 주님의 말씀들이 생각이 났습니다.
주님께서는 요한복음에서 당신이 세상의 빛이며
당신을 따르면 생명의 빛을 얻을 거라고 하셨고(8,12),
당신이 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에는 당신이 세상의 빛이시지만(9,5)
빛이 우리 가운데 계시는 것도 잠시뿐이니(12,35) 빛이 우리 가운데
계시는 동안 빛을 믿어 빛의 자녀가 되라고 하셨지요.(12,36)
그리고 마태오복음에서는 우리도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지요.(5,14)
그렇습니다.
베드로 사도도 우리도 어둠 가운데서 있었기에 빛을 갈망하고 찾았으며
어둠 가운데서 빛을 만나 이제는 우리가 빛의 갑옷을 입고(로마 13,12)
세상의 빛으로 살아가야 함을 자각하고 의식하며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부모가 살아계실 때는 다른 동생들과 마찬가지로 응석받이였을 뿐이지만
부모가 돌아가신 뒤에는 강한 정신력으로 내가 부모 역할을 해야 하지요.
이것을 신앙적으로 이해하면 엘리야와 엘리사의 관계입니다.
주님께서 엘리야를 하늘로 들어 올리실 때 엘리사는
엘리야가 올라가지 못하도록 세 번이나 엘리야를 붙들고 늘어집니다.
그러자 엘리야는 자기가 떠날 때 필요한 것이 있으면 청하라고 하고
이에 엘리사가 엘리야의 영을 두고 떠나라고 청하자
엘리사는 마침내 엘리야의 영을 받아 지닌 예언자가 됩니다.
베드로 사도가 주님이 떠나신 뒤에 주님의 뒤를 이어 부활의 재현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엘리사가 엘리야의 영을 받아 지녔던 것처럼
주님의 영, 곧 성령을 받아 지녔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베드로 사도처럼 부활하신 주님의 부활 재현가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 우리도 주님의 영을 받아 지니는 자가 되어야 함을
묵상하는 오늘이 되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