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은 요한복음 안에서
일곱 번째 표징 이야기에 이어서 나오는 부분입니다.
이 표징을 마지막으로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정했다고
요한은 전하고 있습니다.
성전 정화 이야기가 네 복음서 전체에 등장합니다.
하지만 공관 복음서들에서는
비교적 마지막 부분에 나타나지만,
요한복음에서는 2장에서 첫 번째 표징인
카나의 혼인 잔치 이야기에 이어서 나타납니다.
성전 정화 이야기를
유다인들이 예수를 죽이기로 결정한
결정적 부분으로 복음사가들은 보고 있는데,
요한의 순서에 따르면,
이미 그러한 결정은 복음의 초반부터 나타납니다.
즉 요한복음 2장에서 오늘 읽은 11장에 이르기까지
요한복음 전반부는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정하는 이야기로
진행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다른 관점에서 이 부분을 보기도 합니다.
즉 2장부터 11장까지의 이 부분 안에
7개의 표징 이야기가 배치되어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표징 이야기를 통해서 요한이 하고 싶은 말은
예수가 세상을 구원하는 하느님의 어린양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시작에서도 똑같은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라자로의 소생을 본 어떤 사람들은
예수를 믿게 되었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바리사이들에게 가서 고발합니다.
같은 사건을 두고 누구는 믿고
누구는 고발합니다.
같은 사건을 두고 누구는 하느님의 어린양을 알아보고,
누구는 반란을 일으키는 사람,
세상을 어지럽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만큼 각자 예수를 바라보는 시각이 다릅니다.
그것은 자신을 바라보는 시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우리의 삶 속에서 비슷한 것을 경험합니다.
우리 공동체 안에서 일어나는 어느 한 사건,
형제들 안에서 나타나는 모습들 안에서,
서로 다르게 해석하고,
서로 다르게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은
우리가 각자 자신을 바라보는 시각이 다르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 같습니다.
오늘 하루의 삶 속에서
나는 세상을 어떻게 보고 있고,
나 자신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살펴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