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께서는 오늘 아주 과격하게 성전을 정화하십니다.
이에 유다인들은 무슨 권한이 있어 이러는지 의문을 제기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권한의 문제 때문에 의문을 제기하였다기보다
성전정화 자체를 문제 제기한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왜 성전정화를 하느냐, 뭐가 문제기에 정화하는 거냐? 괜찮다는 거지요.
성전과 관련하여 아직까지도 제가 부닥치는 것이 성전의 무질서입니다.
성당에 들어가면 성경이 신자석에 마구 꼽혀있고
성가집이나 주보가 여기저기 마구 꼽혀 있으며
심지어 과자 봉지나 일반 쓰레기까지 있는 것을 보면
마음이 몹시 불편하여 제 주위만이라도 꼭 정리를 하며 생각을 합니다.
자기 집이나 방 정돈은 잘 하면서 왜 이런 것에 그렇게 무신경한 건지.
아니면 내가 너무 쓸데없는 것에 예민한 것인지.
아무튼 오늘 사람들은 괜찮은데 주님은 매우 분노하시며 정화하십니다.
그런데 이것은 분노입니까, 열정입니까? 굳이 분노라면 분노 중에서도
의노라 할 수 있는데 이는 열정에서 우러나오는 분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저처럼 정리정돈의 문제가 아니라 중심의 문제이지요.
사람 중심이고 그것도 이익과 탐욕의 자기중심인 우리에 비해
주님은 아버지 중심이어야 한다는 열정에서 비롯된 분노이지요.
그런데 생각을 해보면 예루살렘 성전을 이렇게 과격하게 정화하신 주님이
우리도 예루살렘 성전과 같다면 다시 말해서 욕심과 죄들도
지저분하다면 우리도 마구 정화하시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도 정말 그러실까요?
주님께서는 개인이건 공동체건 우리의 성전이 욕심과 죄들로 가득하면
정화케 되기를 바라시고 어떤 때는 가혹한 방법, 곧 시련의 방법으로
정화하시기도 하고 오늘 주님께서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당신 몸을
허무는 방식으로 우리가 스스로 정화하가도 하십니다.
이는 마치 아들이 나쁜 짓을 하면 어머니가 자식에게 매를 대기도 하지만
그런데도 나쁜 짓이 계속되면 당신 종아리를 대신 때리는 것과 같지요.
그런데 “이 성전을 허물어라.”라고 하실 때 이 성전은 어떤 성전입니까?
혹시 우리 공동체가 아닐까요?
우리 공동체는 주님께서 허문 다음 다시 세우겠다고 하신 성전이 아닌가요?
나라는 공동체도 우리 공동체도 하느님이 중심이 되는 성전이 되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도 허물 것은 허물고 세울 것은 다시 세워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나와 우리의 공동체가 성전이 되기 위해
두 가지 상반된 행위 곧, <허묾>과 <세움>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먼저 우리는 허물어야 합니다. 그런데 무엇을 허뭅니까?
말할 것도 없이 하느님이 안 계신 공동체인데
이런 공동체는 빨리 그리고 미련 가지지 말고 단호하게 허물어야 합니다.
한 번은 사순절에 프란치스코가 작은 잔을 만들고 있었는데 시간이 되어
낮 기도를 바치는 중에 그 작은 잔 생각이 났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게 만들면 더 좋았을 것을!’ 하는 생각이 난 것이지요.
하느님을 향한 기도의 열정이 자기가 한 것에 대한 애착 때문에
헤살 받았다고 생각한 프란치스코는 즉시 그 잔을 불속에 던져버렸지요.
지금 우리 공동체 안에서 제도건 법이건 아무리 오래된 관습이건 그리고
내가 그리 공을 들인 사업이건 그것이 하느님을 향한 열정에 방해된다면
그것은 오늘 주님처럼 그리고 프란치스코처럼 허물어야 합니다.
다음으로 허물어져 가는 주님의 집을 다시 세우는 소명을 받은 우리는
이제 <다시 공동체 세우기>를 해야 합니다.
개인주의나 이기주의 때문에 공동체가 무너지고 있다면 형제애를 세우고,
물신주의나 세속주의 때문에 공동체가 무너지고 있다면 얼른 복음화하고,
교만과 고집 때문에 공동체가 무너졌다면 작음/가난을 다시 세워야겠습니다.
우리 공동체는 어떻습니까? 성전입니까? 허물고 다시 지어야 합니까?
이것을 다시 성찰해야 하는 오늘입니다.
이것을 다시 성찰해야 하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