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예수 탄생 예고 ( Annunzizazione: 1472- 1475)
작가 :레오나르드 다 빈치 (1452-1519 )
크기 : 목판 템페라 98X 217cm
소재지 이태리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1. 작가.
작가는 예술가이기 이전 너무나 다양한 자질을 가진 천재 중 한 사람이었다. 그가 전문적으로 관여했던 분야는 참으로 다양해서 한 인간으로서의 초인적 분야에 전문가로서 살았다. 발명, 건축, 음악, 천문학, 공학, 식물학, 역사·지리 등 … 여러 다양한 분야에서 대단한 공헌을 하였고, 당시 항공기에 대한 연구와 시도도 했을 만큼 대단한 혜안과 시대를 앞서 생활태도로 살아간 사람이었다.
그는 피렌체 근방 빈치라는 조그만 마을에서 행세 꽤나 하던 공증인으로 일하던 아버지가 집안 하녀와의 관계에서 낳은 사생아로 태어났다. 사생아의 신분이란, 불행의 상징처럼 여겨지기 쉬웠으나, 집안 어른들의 현명한 처신으로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호기심이 많고, 대단한 창조적인 사고를 지닌 이었다. 그는 인상 깊은 사물이나, 관찰한 것 등을 즉시 스케치하면서 창의력을 개발하곤 하였다.
어릴 때부터 자식의 비범한 자질을 발견한 아버지는 아들이 지닌 다양한 자질 중에 예술가로서의 자질을 키워줄 마음으로 아들이 16세 되던 때에 피렌체로 옮겨 당시 명망 있는 작가로 인정받던 베로키오의 공방에 제자로 입문해서 교육을 받게 하였다.
2. 작품.
이 작품은 바로 이 공방에 와서 20세 초반에 제작했던 작품으로 초기 작품이 줄 수 있는 미숙성과 함께 작가의 천재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그는 평생을 독학으로 공부한 것에 대단한 긍지를 가지고 있었으며, 당시 유행하던 희랍 로마의 문화와 예술에 대해서도 스승을 찾아가서 교육을 받던 아카데미풍의 교육에 대해선 조소적인 견해를 가지고, 이론 보다는 경험을 학문문화 보다는 실천문화의 가치와 중요성을 더 강조했고 이것이 그의 일생을 지배한 생활 철학이 되었다.
이 작품은 작가가 베로키오 공방에서 몇 년을 수학한 후 제작한 작품으로 그의 서명이 새겨진 첫 번의 작품이다. 이것은 부유한 귀족의 요청으로 피렌체에 있는 성 바르톨로메오 수도원 성당의 제단화인데 전형적 르네상스 양식을 취하고 있다. 성모님은 오른편에 앉아있고, 가브리엘 천사는 왼편에서 하느님의 소식을 전하고 있는 형식이다.
이 작품의 배경 뒤에는 닫혀진 정원이 있는데, 이것은 토스카냐 지방의 풍경이다. 작가는 성모 영보의 장면을 성서에 나타나고 있는 갈릴레아 나자렛 마을이 아니라 작가의 고향이요, 르네상스 도시로 대단한 번영을 누리던 피렌체를 배경으로 했다.
나자렛은 구약에는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 미미한 도시에 불과했으나, 신약에서는 19번이나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나자렛은 성모님의 고향이고, 예수님이 어린 시절을 보낸 도시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예수님이 멸시를 받은 첫 번째 이유가 바로 이 도시 출신이라는 것 일 만큼 이 도시는 볼품없는 곳이기에, 작가는 자기 나름대로 당시 사람들이 이해하기 거북한 성서적 바탕 보다는 성모님의 영광과 특은을 강조하기 위해선 유럽에서 활기 있던 도시인 피렌체의 배경이 훨씬 더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했다.
작가는 성모님이 앉아 있는 장소가 피렌체 부자 소유의 큰 저택의 한 부분이며 성모님이 성경을 보고 있는 책상은 당시 피렌체의 실세였던 피에로 메디치(Piero di Lorenzo de' Medici) 의 무덤 장식에 사용한 것과 같은 것인데, 이것은 자기의 스승인 베로키오가 만든 것이며 성모님의 영광을 표현하기 위해 피렌체의 아름다움에 성모님을 모셨다.
이 배경은 작가가 활동하던 토스카냐 지방에서 볼 수 있는 풍경인데, 구약 아가에서 등장하고 있는 그리스도와 그 신비의 상징으로 구약의 다음 내용을 담고 있다.
“ 나의 누이 나의 신부는 울타리 두른 동산이요, 봉해 둔 샘이로다. ” (아가 3: 13)
이 정원은 동정녀로서 예수님을 잉태하신 성모님의 상징이다. 이 세상 어떤 것으로 부터도 영향을 받지 않고 하느님의 은총으로 예수 아기를 잉태한 동정 성모님의 상징이다.
배경은 안개에 쌓인 듯 희마하게 보인다. 이것은 스푸마토(sfumato)라는 기법으로 작가가 모나리자에서도 사용한 극적인 표현이다. 작가가 그림으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신비로움을 표시하는 것이며 동양화에서 볼 수 있는 여백의 처리와 비슷하다. 성경에서 가브리엘 천사의 알림을 들었을 때 마리아는 몹시 놀라고 당황했다는 표현을 하고 있다.
“ 마리아는 몹시 놀라고 당황하여 도대체 그 인사말이 무슨 뜻일까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 ” ( 루카 1, 29 )
그런데 여기 성모님의 표정은 그리 당황한 표정이기 보다는 앞에 놓인 성경책에 손을 얹고, 천사의 말을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어린이처럼 감정이 배제된 조용하고 침착한 표정으로 하느님의 뜻을 따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다.
작가는 이 장면에서 성모님은 성경을 봉독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누구보다도 정확히 헤아리고 있었기에 가브리엘 대천사의 말에 놀라기보다는 그것이 하느님의 뜻임을 알고 받아들이겠다는 부분을 더 강조했기에 성모님의 표정이 여유 있는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다.
작가는 천사가 인사한 “은총이 가득한 이여 ” 라는 인사의 내용은 성모님이 항상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기 위해 말씀에 가까이 했기에, 하느님의 뜻을 더 잘 알아듣는 여인이라는 뜻이 포함되고 있다는 것을 여유 있게 대천사를 대하는 모습으로 표현하였다.
성모님 주위에 황금빛 광휘와 얼굴 전체에 퍼져 있는 밝은 빛으로 싸인 그분의 얼굴은 성모님이 세상에 빛으로 오실 구세주를 모셔올 존재임을 상징하고 있다. 성모님은 가브리엘 천사의 알림을 듣고 먼저 당황하기 이전에 하느님의 뜻을 알아들은 표정으로 등장하고 있다. 그러기에 성모님의 모습은 당당하다. 인간적으로는 두려운 일이지만 하느님의 뜻이 기에 받아들인다는 수동적인 태도보다는 더 적극적으로 하느님의 뜻을 수용하는 모습이다.
작가는 현대적 의미의 여성상을 미리 예견하고 이해했기에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인다는 것을 수동적인 표현으로 하기보다 적극적인 협조의 자세로 당당히 표현했다. 이 작품에 가브리엘 대천사가 오기 전 성모님은 성서를 보시면서 하느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알았기에 성모님은 중세기의 여느 여성처럼 무식한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을 뜻을 이미 헤아리고 있었기에 가브리엘 천사의 알림에 동요치 않는 모습은 성모님을 통해 드러나는 여성의 탁월성도 표현하고 있다.
작가는 성모님을 당시 수준의 어린 처녀의 모습으로 그리면서도 하느님의 뜻을 알아듣고 받아들일 수 있는 성숙성을 함께 표현한 것은 루카 복음에 나타나고 있는 성모님에 대한 최고의 찬사인 은총이 가득하신 여인의 모습을 작가 나름대로 부각시키기 위한 것이다.
“그 천사는 마리아의 집으로 들어가 ”은총을 가득히 받으신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루카 1: 28) 라는 성경 말씀에 포함된 은총이 가득하신 여인의 모습을 인간적인 당당함으로 표현했다.
가브리엘 천사 역시 하느님의 뜻을 전하기에 위해 온 하느님의 사신답게 당당한 모습이다. 하느님이 선택하신 성모님이 앞에 무릎을 꿇고 있지만 조금도 위축됨이 없는 당당한 모습니다. 그가 왼손에 들고 있는 백합은 중세 상징으로 동정의 상징이다.
성모님의 잉태가 인간 남녀의 결합과 다른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의 작용이기에 성모님의 동정성의 상징이다.
성모님의 동정성은 성관계를 하지 않았다거나 숫처녀 숫총각이라는 개념과 무관한 것이다
성모님의 동정성은 이런 신체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다.
즉 성모님은 하느님이 원하시면 처녀로 남을 수도 있고 어머니도 될 수 있다는 하느님의 뜻에 자신을 온전히 맡겨
자기를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의 어머니로 살겠다는 결의이며 이것은 성모님의 삶을 통해 드러난다.
성모님은 아들 예수님 살아 생전엔 그분을 따르다가 인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못박히신 순간에도 십자가 곁을 지키시며 어머니 역할을 하시다가 , 주님 승천후 사도들이 불안해 하며 모인 마르코의 다락방에 성모님도 함께 하셔서 성령을 받으심으로 새로 시작되는 교회의 어머니가 되셨다. 이처럼 성모님의 동정성은 교회의 어머니로서 그분이 하신 역할을 표현하는 것이다.
천사는 오른손을 성모님 쪽을 향하여 펴고 있는데, 그 손가락의 자세가 장차 성모님을 통해 오실 구세주를 상징하고 있다. 초세기 비잔틴 성화인 “ 천지의 창조주 그리스도”, “백성들을 축복하시는 그리스도” 에서 주님은 왼손엔 성경을 들고 오른손으로 사람들을 축복하시는데, 그 손의 모습과 같다. 즉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의 표현인 두 개의 손가락과 삼위일체로 천주의 성자이신 표시로 세 개의 손가락이 백성들을 축복하시는 그리스도의 손으로 표현되는데 ,대천사 가브리엘의 손모습도 바로 성모님에게서 태어나실 아기는 하느님의 거룩한 아들임을 상징하고 있다.
대천사의 상징인 날개는 다른 작품에 나타나고 있는 천사의 날개처럼 인위적인 상상적인 모습이 아니라, 큰 새의 날개처럼 생명감이 있는 날개로 되어있다. 작가는 예술가이기 이전 과학자로서도 대단한 관찰력이 있었으며 그의 생애에 이미 비행기의 모형을 만든 사람이었기에 일생을 인간이 날개를 달고 하늘을 날수 있는 가능성을 생각하면서 지냈다. 이 천사의 날개는 단순히 천사의 모습이 아니라 그가 일생의 화두로 삼았던 하늘을 나는 존재로서의 인간에 대한 원초적 그리움의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작가는 후에 이 천사의 날개를 현실화시킨 것이 바로 비행기로 구체화되었다. 대단한 창의력을 지닌 그는 너무도 세심한 관찰과 정확한 표현을 생명으로 했기에 예술가로서의 작품은 그리 남기지 못했으나 그의 작품은 희귀한 것만큼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과 의문점을 남겼다.
작가는 그 당시 이태리 사람들이 다 그렇듯 가톨릭 신자이긴 했으나, 그의 신앙심은 그리 깊지 못했다. 작가와 같은 시대 사람이었던 미켈란젤로는 혼신의 노력을 다해 종교적 걸작을 남겼으며 그는 대단한 신앙심을 지닌 인간이었기에 수도승 같은 마음으로 작품 제작에 몰두했다.
여기에 비해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너무나 다양한 소양과 자질을 지녔기에 종교적인 작품은 그 인생에 한 부분이 될 수밖에 없었고, 사치스러운 성격은 여러 사람들과 교유(交遊)를 좋아하고, 향한 외부적인 일에 관심이 많았기에 최고의 내면세계를 강조해야 하는 종교적 주제에 접근에는 미흡한 점이 많기도 했다.
그러나 그 다운 천재성과 정밀성으로 다른 작가들이 보이지 못했던 면을 제시한 것도 사실이며, 이 작품 안에 작가는 성모님을 나자렛의 비천한 처녀가 아닌 당시 유럽의 최고 첨단 도시였던 피렌체시의 정서에 어울리는 모습으로 등장시킴으로서 당대 사람들의 취향에 맞는 감동을 준 것도 사실이다.
르네상스 시대 예술 작품의 주제의 87 %는 종교적 주제였고 이 중에서 50%는 성모님의 주제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작품은 천재라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이라는 것 외에도 시대를 앞선 폭넓은 과감한 표현을 시도를 했다는 것만으로도 가치를 부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