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제가 강론을 쓸 때 대략 두 가지 방식으로 씁니다.
전체적인 대의를 생각하며 강론을 쓰거나
읽다가 어느 한 구절이 마음에 들어오면 그것을 중심으로 쓰곤 합니다.
그런데 오늘은 부스러기라는 말이 눈에 들어오면서
이런 제목이 즉시 머리에 떠올랐습니다.
<부스러기 인생>
그리고 이전에 올린 강론을 보니 6년 전에도 비슷한 강론을 올렸습니다.
[나는 강아지로소이다.
개새끼라는 말이외다.
주인집 상 밑을 어슬렁거리다
떨어진 부스러기나 주워 먹는 강아지외다.
남들은 나를 주인집 아들과 비교하며 딱하다지만
그래도 나는 어미의 사랑을 듬뿍 받는 행복한 강아지외다.
하느님의 은총 중에 어미의 사랑만한 은총이 어디 있습디까?
그것도 저의 어미 같은 사랑은 보기 드문 사랑이외다.
제 어미의 저에 대한 사랑은 어떤 모욕도 생채기 하나 낼 수 없었으니.
불가마 속에 던져진 세 소년에게 어느 불꽃도 범접치 못한 것처럼,
아니 범접했을지라도 자유로웠던 그들처럼 모욕은 사랑을 모욕할 수 없고
사랑은 모욕으로부터 자유로움을 제 어미에게서 저는 넉넉히 봤소이다.
................
마귀보다 더 강한 어미의 사랑을 보고
고통보다 더 강한 사랑을 믿게 되었소이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어미의 사랑이 하느님 사랑의 부스러기였소이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고,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당신 사랑을 고루 나눠주시니 제게는 제 어미가
당신 사랑의 일부요, 당신의 사랑의 부스러기였소이다.
부스러기이지만 너무도 충분한.....]
오늘 복음의 여인처럼 부스러기의 인생을
아름답고 고귀하게 만든 여인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 여인의 아름다음과 고귀함은 부스러기의 인생이 아닌 사람보다
더 아름답고 더 고귀합니다.
사치스런 치장을 한 여자보다 더 아름답고 고귀하다는 뜻입니다.
얼마나 내면이 꽉 차 있으면 그리 지독한 모욕을 당하고도,
그것도 주님으로부터 모욕을 당하고도 비참해지기는커녕
오히려 내면의 품위와 귀티가 돋보입니까?
사실 주님은 자타가 공인하는 인자하고 공의로운 분 아닙니까?
다른 사람 다 차별을 하여도 주님만은 세리를 차별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의사는 병든 사람에게 필요하다시며 그들과 식사를 같이 하셨고,
그래서 이 여인도 용기를 내어 자기 딸을 고쳐달라고 한 것이 아닙니까?
사실 다른 사람한테 모욕을 당하며 으레 그러려니 해도
주님만은 그런 분이 아니라고 믿기에 주님께 그런 모욕을 당하면
웬만한 사람들은 더 서럽거나 더 참혹한 심정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어떤 모욕에도 훼손되지 않는 품위를 지녔고
주님의 가혹한 모욕에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지녔습니다.
이 여인은 겸손하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부스러기 인생이라고 하셨을 때 그렇다고 인정만 한 것이 아니라
자기와 자기 딸의 부스러기 인생을 진정 사랑하였던 것입니다.
부스러기 인생 같지만 사랑을 하는 한 부스러기 인생은 없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