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
오늘은 주님 봉헌 축일인데 이 축일의 의미는 주님의 봉헌을 본받아
우리의 봉헌생활도 다시 정비하고 의미에 맞게 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저는 저의 봉헌생활을 다시 한 번 성찰하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2년 전부터, 특히 작년 하반기부터 저는 저희 삶을 심각하게 되돌아보고,
이전까지의 삶과는 다른 삶을 살아야겠다는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지금 이곳 가리봉에 와서 사는 삶입니다.
지금의 삶과 이전의 삶을 구분하면 이전의 삶이
많은 책임을 맡았던 삶이라면 지금의 삶은 책임은 가볍고
비교적 저의 수신에 중심을 두며 살아가면 되는 삶입니다.
여러분으로 치면 일생 자녀들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는데
이제 그 책임에서 벗어나 자신을 위한 삶을 살게 된 것과 비슷한 거지요.
그런데 수신修身이 뭡니까?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닦자는 것인데 이것은 수도자가
자기만 알고 자신만을 위해 살자는 이기적인 것 아닐까요?
사실 그런 것도 같아 마음 한 편에 걸리기는 것이 있기는 합니다만
이기적인 뜻에서라기보다는 제가 그동안 자기 앞가림도 못하면서
너무 많은 책임을 맡고 잘못 살아왔다는 반성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기적인 이유가 아니라 주제에 맞게 살자는 겸손의 이유입니다.
그러나 제가 살려고 하는 수신의 삶이 겸손의 이유일지라도
그리스도교 수도생활의 본질적이고 궁극적인 이유와는 다르지요.
어떻게 보면 수신의 측면은 불교의 수도생활이 더 뛰어나고
유교에서도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하라고 하잖습니까?
우리의 수도생활은 근본적으로 수신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일치이고,
그러므로 수신도 하느님과의 일치를 목적으로 하며,
하느님과의 일치를 위해 소극적으로는 자신을 근신謹身하는 것이요
적극적으로는 자신을 완전히 하느님께 내어드리는 것, 곧 봉헌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하고 싶은 것을 다 하고 사느냐고 흔히 얘기하는데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없어서 다 하지 않고 사는 것이 아니라
설사 할 수 있어도 갖가지 욕망과 욕심을 스스로 봉헌하는 겁니다.
이것이 근신 또는 소극적인 봉헌이라면 적극적인 봉헌은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고 하느님 원하시는 일에 헌신하는 겁니다.
그런데 소극적 봉헌이니 적극적 봉헌이니 얘기했지만
영적으로 더 깊은 의미가 있는 것은 축성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봉헌에는 봉헌되는 것이 있고 봉헌하신 것이 있습니다.
마리아가 주님을 봉헌하신 것과 주님이 스스로 봉헌하신 것이고,
이것을 수도 성소와 비교하면 ‘어머니 성소’와 ‘자기 성소’입니다.
수도원에서 보통 ‘어머니 성소’라고 하면 부정적인 의미입니다.
자기는 원치 않았는데 어머니에게 떠밀려서 들어왔고
그래서 의미도 없이 억지로 살다가 마침내 포기하는 성소입니다.
물론 이런 거라면 봉헌되는 것, 어머니 성소는 별로 좋은 의미가 아니지만
봉헌되는 것이 축성되는 것이고, 그래서 그 축성의 의미를 더 깊이 산다면
영적으로 더 깊은 의미의 성소를 산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어머니의 아이가 되고 하느님 나라의 어린이가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없고, 자기 뜻도 없으며, 그리고 자기 힘으로 살지도 않습니다.
성자로서 성부의 뜻에 따라 세상에 봉헌되시고,
성모의 아들로서 성모의 손에 의해 성전에 봉헌되시며,
마침내는 성부의 뜻에 따라 십자가 위에서 봉헌되십니다.
그래서 제가 주님을 제대로 본받아 산다면 되는 대로 사는 것인데
이런 표현이 이상하면 이제부터 저는 되어 가는 대로 사는 것입니다.
힘도 없는데 아등바등 제 힘으로 살지 않아도 되니 좋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