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두려움의 두 가지 모습을 보게 됩니다.
하나는 돌풍에 의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고,
다른 하나는 하느님의 능력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두려움은 우리에게 고통을 가지고 옵니다.
그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무기력감을 느끼게 되고,
그 무기력감은 우리를 더 힘들게 만듭니다.
이러한 사실에 있어서 두 가지 두려움은 비슷하지만,
두 가지 두려움이 똑같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내 생명을 빼앗길 것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내 생명은 내 것인데,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내 생명을 잃게 되는 상황이 다가올 때,
빼앗기고 싶지 않은 마음이 강할수록,
그 두려움은 강하게 다가옵니다.
그 두려움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믿음을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그 믿음은 과연 무엇일까요?
모든 피조물에게 생명을 주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우리는 그 생명을 우리의 노력으로 얻은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거져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여러 상황 속에서
생명을 빼앗길 수 있을지라도,
하느님께서 원하신다면
그 생명을 다시 주실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믿음은,
하느님께서 원하신다면 우리는 아무 조건 없이
생명을 다시 얻을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하느님께서 다시 주실 것이기에
지금 당장 빼앗기는 것이 두렵지 않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두 번째 두려움과도 연결됩니다.
하느님의 신성을 인간이
이해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기 때문에,
그 위대하심 앞에서 우리는
우리 각자의 초라한 모습을 볼 수밖에 없습니다.
나의 약함을 보는 것은 때로 나를 주눅들게 하며,
죄인처럼 움츠러들게 합니다.
물론 하느님의 신성 때문에
우리는 거져 우리의 생명을 얻었고 또 얻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신성만을 강조한다면
우리는 하느님께 다가갈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 다가갈수록 우리의 연약한 모습만 더 보이고,
그러한 약함을 보는 것은
별로 기분 좋은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다시 주시는 것도
당신의 위대하심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 사랑을 드러내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오늘 복음 환호송이 노래하듯이,
당신 외아들을 내주시어,
우리가 영원한 생명, 하느님과의 온전한 일치를
허락하시는 사랑입니다.
즉 두려움을 통해서 하느님과 거리를 두고
하느님과 멀어지는 것을 바라지 않으시고,
당신의 위대하심 뒤에 있는 당신의 사랑을 통해서
우리가 당신께 다가오기를,
그렇게 당신과 하나 되기를 원하십니다.
여기에서 두려움을 극복하는 믿음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서
인간이 되시어 우리게에 다가오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믿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육을 취하셨기 때문에
우리를 닮아 인간의 약함을 지니셨기 때문에,
우리도 우리의 약함을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약함을 인정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위대하심을 마주할 때 느끼는 두려움도 인정하고,
그 두려움에서 벗어나려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그 두려움 속에서 하느님께 의지하는 겸손으로 나타납니다.
하느님에 대한 믿음으로 우리는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마주 대할 수 있습니다.
두려움을 느낄 때마다
우리 곁에 함께 계시는 하느님도 함께 느낄 수 있기를
기도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