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은 기뻐하며 다윗 성으로 하느님의 궤를 모시고 올라갔다.
다윗은 황소와 살진 송아지를 제물로 바쳤다.
다윗은 온 힘을 다하여 주님 앞에서 춤을 추었다.”
제게 다윗은 사랑할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다윗이 위대한 임금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임금으로서의 위엄과 위대한 업적 때문이 아니고
오히려 그 반대로 한 인간으로서 지닌 순수한 인간미와
인간미를 바탕으로 한 진실한 신앙의 모습 때문입니다.
오늘 사무엘기의 얘기도 이런 다윗을 잘 보여줍니다.
전쟁에서 이기고 주님의 궤를 모시고 오면서 다윗이 춤을 춥니다.
이것은 보통의 경우 임금으로서는 대단히 채신머리없는 행동이지요.
그래서 사울의 딸이자 아내인 미칼도 빈정거립니다.
“오늘 이스라엘의 임금님이 건달패 가운데 하나가 알몸을 드러내듯이,
신하들의 여종들이 보는 앞에서 벗고 나서니 그 모습이 참 볼 만하더군요!”
이에 다윗은 이렇게 답을 합니다.
“주님께서는 나를 뽑으시고, 주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도자로 세우셨소.
바로 그 주님 앞에서 내가 흥겨워한 것이오.
나는 이보다 더 자신을 낮추고 내가 보기에도 천하게 될 것이오.”
저는 이런 다윗이 우리 기도의 모범이라고 생각하는데
우선 다윗은 오롯이 하느님 앞에 있는 존재로서 모범입니다.
이는 제가 그렇지 못한 것에 대한 반성이기도 한데요,
저는 성당에 있을 때나 미사를 드릴 때나 기도를 드릴 때
오롯이 하느님 앞에 있지 못하고 사람들 앞에 있습니다.
사람들을 의식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럴 때 이러한 저를 제가 의식을 하면 저는
이런 제가 부끄럽고 비참하기까지 하여 저를 한없이 멸시하게 됩니다.
그리고 다시 사람들을 의식하지 않고 하느님 앞에만 겸손하게 있게 되면
내적평화와 함께 저에 대한 은근한 사랑이 스며듭니다.
그런데 기도 중에 남을 의식할 때 왜 이런 느낌이 들겠습니까?
그것은 창녀가 몸을 팔듯이 저를 값싸게 파는 것이기 때문이고,
(이런 표현 정말 쓰고 싶지 않지만 뜻을 더 잘 전달하기 위해
이런 표현을 쓰는 것에 대해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쇼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면에서 다윗은 왕의 채신이나 사람의 시선을 의식치 않고
하느님 앞에만 있고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대로 행동을 한 거고,
그야말로 제대로 기도를 한 것입니다.
다음으로 다윗은 온 힘을 다하여 춤을 췄다고 하는데
아오스딩 성인의 말대로 성가를 부르는 것이 두 배의 기도라면
다윗이 춘 춤은 열 배, 백 배, 천 배의 기도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것은 온 마음과 정성, 온 힘과 존재로 바치는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간해서는 춤을 추지 않는 사람,
아니 춤을 출 줄 모르는 사람, 곧 무능한 사람입니다.
이것은 재능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마음이 경직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어쩌다가 아무도 없는 제 방에서 혼자 춤을 출 때가 있습니다.
제가 가끔 트는 오르간 곡인데 그 오르간 곡을 틀면 춤이 나옵니다.
그래서 춤으로 하느님을 찬미하고 싶을 때 그 곡을 트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는 참으로 분심잡념이 없다는 것을 느끼고,
그 춤으로 제가 순수해지고 정화되었다는 느낌도 듭니다.
그런데 제 방에서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 앞에서도
하느님께 찬미의 춤을 출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때는 아마 제가 성인의 경지에 올랐을 겁니다.
아멘~^^♥
미사 참례했다가 아니라 진짜로 주님의 십자가상 제사를 드리고 부활을 목격하고
부활의 증인이 되는 것.
사랑했다가 아니라 진짜로 사랑하는 것.
무엇이든지 그냥 했다가 아니라 진짜로 하는 것....
내 평생의 기도꺼리...
나도 다윗처럼 그렇게 주님을 사랑하고 싶다 온전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