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작은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오늘 복음은 제가 참으로 생각을 많이 한 복음이고,
강의 때도 수없이 얘기한 복음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한 번도 주목하지 않은 말이 오늘 눈에 들어왔는데
다름 아닌 <작은이들 가운데 하나>라는 말입니다.
작은이라!
잃어버렸다!
그것도 하나를 잃어버렸다!
이렇게 말들을 조각조각 내뱉었는데 그것을 모아 보니
작은이이고 하나이기에 잃어버리는 거라는 말이 되었습니다.
사실 크면 잘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고, 잃었을 지라도 쉽게 찾겠지요.
그런데 우리가 다시 주목을 해야 하는 것이 오늘 얘기 중에 앞에서는
<길 잃은 양>이었는데 뒤에서는 <잃은 양>이 되는 점입니다.
그런데 <길 잃은 양>과 <잃은 양>은 주어가 다릅니다.
귀책사유, 곧 책임이 다르다는 얘깁니다.
<길 잃은 양>은 양이 주어이고 양이 길을 잃은 겁니다.
이에 비해 <잃은 양>은 목자나 공동체가 양을 잃은 거지요.
우리는 목표를 잃고 방황을 할 때 길을 잃었다고 하고
그것은 개인의 책임이고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더욱이 가정의 경우에는 부모가, 수도회의 경우에는 공동체가
목표와 방향을 제시했음에도 그것은 싫다고, 자기의 길을 가겠다고
뛰쳐나가서는 길을 잃고 방황하는 경우 더더욱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자기 인생은 자기 책임이고
누가 어떻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책임을 냉정하게
개인에게 돌리고 공동체는 책임에서 쏙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공동체는 분명 인간적으로 사랑의 공동체가 아니고
신앙적으로도 공동체가 함께 주님께 가는 그런 공동체가 아니지요.
이런 공동체에서는 인간적으로나 신앙적으로 성숙한 사람이나
목소리가 큰 사람만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어린이나 어른이어도 어린이처럼 미성숙한 사람은
이 공동체에서 소외 또는 도태되거나 주변으로 밀려나게 되지요.
그러므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작은이란
공동체 안에서 소리가 작은 사람, 비중이 작은 사람입니다.
아무리 소리를 내어도 그 소리가 공동체에 들리지 않고,
공동체 안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도 작아
공동체 안에서 자기의 존재감을 느낄 수 없습니다.
전에 제가 관구 봉사자를 할 때
한 형제가 수도원을 떠나겠다고 찾아왔습니다.
제가 왜 떠나려고 하느냐, 어떻게 해주면 되겠냐고 하니
이제 와서 뭘 어떻게 하겠다는 것은 이미 늦었다고,
이미 마음이 떠나서 어쩔 수 없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이제 나가려고 하니까 왜 떠나느냐, 어떻게 해주면 좋겠냐 하는데
평소에 자기의 소리를 한 사람이라도 진지하게 들어주고
자기를 존중해주었다면 이렇게 떠나지 않았을 거라고 말하는 거였습니다.
이런 경우 개인이 떠난 것이지만 실은 공동체가
한 형제를 품지 못해 떠나게 한 것이고 잃은 것이며,
그 이유가 작은 소리를 듣지 못하고 무시하였기 때문이지요.
말썽이나 소란을 피워야지만 소리가 들리는 공동체,
애들은 가라거나 애들은 가만히 있으라는 공동체는
잠재적으로 길 잃은 양과 함께 사는 공동체임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