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어린이를 사랑하시는 예수 (1910년)
작가 : 에밀 놀데 (Emil Nolde : 1867- 1966)
크기 : 켐퍼스 유채 86.5 X 106,5cm
소재지 : 미국 뉴욕 현대 미술관
교회 전례는 그리스도가 우리의 왕이란 신앙 고백으로 한해를 마무리 하고 우리와 똑 같은 인간의 모습으로 오시는 그리스도의 성탄을 준비하는 대림시기를 시작하게 된다.
즉 크리스챤들은 성탄을 새 역사의 시작으로 여기기에 대림절을 통해 그리스도의 존재성과 기다림의 의미를 확인하고 있다.
예수의 탄생은 새 역사의 시작임이 달력을 통해서도 드러나게 된다.
그리스도 오시기 전(Before Christ), 그리스도 오신 후(Anno Domini)는 서구 문화에서 발견할 수 있는 그리스도 존재성의 표현이라 볼 수 있다.
인간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가장 단적으로 표현한 것이 바로 말구유에 탄생하신 예수에 관한 것이 성탄의 주제적 표현이 되고 있다.
그런데 예수님의 성탄이 역사적인 사건으로 알려지면서도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의 모습을 이해하기에는 많은 세월을 필요로 했다.
로마에 전파된 복음이 긴 종교 박해를 견디고 313년에 종교의 자유를 얻으면서 초기 교회 지도자들은 자기들이 믿는 예수가 우리와 똑 같은 인간으로 오신 것으로 묘사하는데 부담을 느꼈다.
왜냐하면 로마 문화권에서 당시 로마제국의 식민지였던 이스라엘에서 예수님이 태어나셨다는 것은 인정받을 수 없는 것이었고, 여기에 겹쳐 로마 제국에서 최고의 정치범들에게나 줄 수 있는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신 예수님의 모습은 아무리 해도 로마 문화권에선 수용되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이런 인간적인 갈등의 해결책으로 크리스챤이 믿는 예수는 당시 그리스 문화권에서 믿던 제우스 신이나 로마 제국에서 믿던 쥬피터 신으로 묘사하는 것이 설득력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런 경향에 의해 예수님의 모습은 후광에 감싸인 힘 있는 신의 모습으로 드러나게 되었고 이것이 비잔틴 시대에 와서는 황제의 모습으로 까지 표현되었다. 한마디로 가시관을 쓴 예수가 아닌 왕관을 쓰신 예수의 모습으로 정착되었다.
그러다가 12세기 탁발 수도회가 시작되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분이 바로 예수라는 인간 예수의 관점을 주님 선교 활동 때에 있었던 기적 장면이나 치유 장면의 모습이 그리스도가 인간 예수의 모습을 전하는 대종이었다.
그런데 성서의 삶에서 가장 인간 예수의 모습으로 드러나는 것은 바로 어린이들을 환대하시는 예수이다.
그동안 교회는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예수를 강조하는 과정에서 그분의 신성에 대한 강조는 예수를 경배와 공경의 대상에 두게 되었으며, 하느님 나라를 가르치는 교사로서의 존재로 부각하면서 인간적인 면이 충분히 표현되지 않았는데, 작가는 표현주의 작가답게 일체 군더더기를 다 배제하고 우리와 꼭 같은 인간 예수의 모습을 부각시키는데 중점을 두었다.
작품은 다음 성서 구절의 표현이다.
13 그때에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들에게 손을 얹고 기도해 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제자들이 사람들을 꾸짖었다.
14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이르셨다. “어린이들을 그냥 놓아두어라.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사실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15 그리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 주시고 나서 그곳을 떠나셨다. (마르 10,13-16)
성서에서 ‘어린이’ 는 예수님 가르침의 중요한 부분을 표현할때 등장하고 있다. 성서에서는 예수의 제자들인 교회 지도자들이 해야 할 처신으로서 항상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며 섬기는 삶을 살라는 가르침을 주실 때 어린이의 비유가 등장하고 그다음이 여기 나오는 내용이다.
성서에서 어린이라는 존재는 자기의 힘이나 명성을 믿지 않고 적수공권의 자세로 하느님의 자비에만 매달리는 순박한 인간의 전형이다.
자기에게 아무런 힘이 없는 것을 알고 있으나 하느님께 대한 신뢰가 너무 강하기에 어떤 두려움이나 움츠러듦이 없이 자유롭게 살아가는 인간의 모델이다.
주님이 말씀하신 “마음이 가난하기에 행복한 사람”(마태오 5:2) 의 전형적인 모델이 바로 어린이기에 산상 수훈의 교훈을 몸으로
인간 집단엔 어디나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항상 수직적 위계질서가 생기게 된다.
권력을 쥔 사람, 많이 가진 사람, 많이 배운 사람, 잘 생긴 사람, 능력 있는 사람과 여기에 반대되는 사람, 이런 것과 무관하게 살아가는 사람의 모델로 바로 어린이를 제시했다.
돈독한 신앙인이었던 작가는 성서에 나타나고 있는 예수님을 여러 점 남겼으나 어린이들의 환대를 받는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은 건강한 감수성을 지닌 인간으로 표현하고 예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선 도덕적인 삶의 자세나 윤리적 처신 못지않게 건강한 사랑의 감수성을 지닌 인간이 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작가가 자연주의에서 표현주의로 탈바꿈하면서 신앙의 표현에 있어서도 어떤 인간적인 군덕지도 허세도 다 배제했을 때 예수의 참 모습을 볼 수 있음을 과감히 표현했다.
작가는 밝은 색과 어둔 색의 대비만으로 복음을 살아가는 사람의 참 모습을 제시했다.
빨간 색과 노란 색이 화사하게 어울리는 어린이들을 푸른 옷을 입은 예수님이 반기고 있다.
작가는 단순한 삼원색의 조화를 통해 아이를 동반한 어머니, 어린이, 인간 예수 모두가 하느님 안에 한 기족이며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고자 하는 운명의 공동체임을 표현하고 있다.
복음이 강조하는 기쁨 평화 위로 열정과 같은 덕목이 예수님을 보고 기뻐하는 어린이들과 이들을 반기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하느님 나라의 기쁨을 앞당겨 살아가는 이 땅의 크리스챤들의 모습이 드러나고 있다.
서로 조건 없이 사랑하며 부담 없이 받아들이는 삶이 바로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삶임을 표현하고 있다.
주님께서 당신께 안기고 싶어 안달을 하는 한 아이를 마치 육신의 아버지가 하듯 격렬하면서도 다정히 안아주자, 어린이는 눈을 크게 뜨고서 예수님과 눈 맞춤을 하며 더 없이 행복해진 모습이다.
묵시록의 마지막 부분에서 하느님을 만난 인간의 행복한 모습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하느님의 얼굴을 뵈올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이마에는 하느님의 이름이 새겨져 있을 것입니다.
이제 이 도성에는 밤이 없어서 등불이나 햇빛이 필요 없을 것입니다.
주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빛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묵시록 22: 4- 5)
불교에서는 인간의 완성된 경지를 해탈이나 열반이라는 표현으로 표현한다면, 우리 교회는 지복직관(Visio beatifica)이란 용어로 표현하는데, 여기 예수님 품에 안긴 아이의 모습은 바로 이 경지를 표현하고 있다.
예수님의 사랑 속에서 안긴 인간은 바로 더 없이 행복한 인간이기에 시편에서 노래하는
“야훼는 나의 목자 아쉬울 것이 없노라”(시편 23:1) 라는 더 없이 충만한 경지를 표현하고 있다.
작가는 성서에 나타나고 있는 여러 교훈적인 내용 못지않게 예수님의 너무도 인간적이고 자상한 모습을 통해 크리스챤 삶은 인간의 감수성을 신앙으로 표현하는 것이란 메세지를 전하고 있다.
믿는다는 것은 신조나 교리를 정확히 알고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향한 전폭적인 신뢰로 작품에 등장하고 있는 어린이들, 아이들을 동반한 어머니처럼 예수님께 매달리며 예수님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을 말한다.
어린이들과 예수님이 서로 어울려 큰 기쁨을 표현하고 있는 반대편에 있는 제자들은 이 광경을 바라보며 못 마땅해 하고 있다.
다음 성서 구절의 표현이다
“그때에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들에게 손을 얹고 기도해 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제자들이 사람들을 꾸짖었다” (마르코 10: 13)
여기에 등장하는 제자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일그러진 어두운 모습이다.
진리를 살아가기에 더 없이 밝고 구김살 없는 모습이 아니라 음흉한 내면의 표시가 드러나는 것 같은 묘한 표정들과 등장하는 인물의 공통적인 특징은 그리 마음이 편치 않다는 것이다.
성서에 예수님께서 가장 격렬히 나무라고 질책한 집단의 상징이다.
성서는 이런 유형들의 인간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과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마태오 23: 1-3)
이들은 열심 하지 못해 문제가 아니라 잘못 열심 해서 문제가 된 사람들이며 오늘도 교회 안에서 복음의 기쁨을 보이는데 큰 방해물로 등장하는 존재들이다.
교회가 외치는 쇄신과 회개하는 것은 냉담자들이 교회로 돌아오라는 것 못지않게 교회 안에 둥지를 틀고 있는 잘못된 믿음의 집단들에 대한 질책이라 본다면 오늘 우리 교회 안에서도 쉽게 만날 수 있는 모델들이다.
작가는 나름대로 돈독한 신앙을 가진 크리스챤이었기에 교회가 가르치는 예수의 모습이
복음과는 다른 이저러진 모습의 예수임을 마음 아파하면서 나름대로의 신앙고백을 하고 싶었기에 작가가 생각하는 예수의 바른 모습을 이 작품을 통해 표현하고자 했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감수성 풍부한 인간으로 자기를 필요로 하는 모든 이를 안아 주시고 받아 들이는 대단한 사랑의 개방성을 지닌 예수의 모습이야 말로 이상적 크리스챤의 모델임을 제시하고 있다.
근래 부산교구의 존경받는 신학자이신 서공석 신부님께서 “그리스도인 그 정체성과 죽음과 희망”이라는 신학자 깊은 사유를 담은 책을 출판하셨다.
여기에서 신부님께서는 오늘날 교회가 규범의 준수에 너무 비중을 두는 것은 하느님의 모습을 왜곡시키며 사람들을 살리는 복음이 아니라 사람들을 단죄하고 교회 밖으로 내쫓는 채찍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하시며 고백성사나 혼인 조당과 같은 것에서 벗어나 “사람을 살리는 일이 중요하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이 시대를 꿰뚫어 보신 신학자의 예언적 혜안으로 볼 수 있다.
작가는 빛과 어둠이 교차되는 갈등이 아직도 남아 있는 교회의 답답한 현실을 보면서
그가 체험한 내적인 확신을 이 화폭에 담아냈다.
그는 오늘도 예수님 시대와 같이 율법 교사들로서 우글대던 어둠이 깃든 교회 현실을 외면하지 않으면서 어린이를 아무 조건 없이 받아들이는 예수님의 밝은 모습을 재현하고 있는 교회의 긍정적 모습의 표현을 더 강조하면서 관람자들에게 어두운 율법 교사적 삶에서 벗어나 예수님이 보이신 조건없는 사랑의 정점인 어린이와 어울리는 것의 상징인 빨강 파랑 노랑의 조화 속에서 생기를 보이고 있는 예수의 제자가 되라고 권고하고 있다.
작가는 자기가 이해한 복음의 진수를 이 작품을 통해 표현함으로서 예술가로서 복음의 핵심을 표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