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오늘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을 따라 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 안에 세 가지 단어가 있습니다.
<주님을 따름>, <자기를 버림>, <십자가를 짐>
어느 것이 제일 중요하고 우선입니까?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르라고 하셨으니
순서적으로는 자기를 버림과 십자가를 짐이 앞서지만
주님은 “내 뒤를 따라오려면”이라는 말을 앞에 하십니다.
그러니까 영어 번역에서는 이것이 확실하게 드러나는데
‘당신을 따르기를 원한다면’의 뜻이 이 안에 있습니다.
주님을 따르고픈 마음이 먼저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을 따르고 싶은 마음이 먼저 있어야 합니다.
따르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으면 따름은 애초에 안 되는 것이고,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것은 더더욱 안 되겠지요.
그러니까 우리는 오늘 나는 주님을 진정 따르고 싶은지 물어야 하고,
따르고 싶다면 왜 따르고 싶은지 이것을 물어야 합니다.
제 생각에 따르는 데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사랑의 따름과 얻기 위한 따름입니다.
사랑의 따름이란 사랑하는 사람을 따르는 것입니다.
사랑의 따름이란 사랑하는 것 이외의 아무런 다른 이유가 없고,
사랑하는 사람을 따르는 것 이외에 아무 다른 목적도 없습니다.
언제가 길을 가다가 엄마를 따라가는 아이를 본 적이 있습니다.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인데 그때 그것을 보면서
‘저 아이는 자기가 가고자 하는 어떤 목적지가 따로 있지 않고
그저 엄마가 가는 곳이 자기가 가야 할 곳이고 있어야 할 곳이구나!’
이런 생각을 하며 저를 반성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보고 왜 제가 저를 반성했을까요?
제가 주님을 따름에 있어서 그 아이와 같지 않기 때문이었겠지요.
제가 볼 때에 저는 그저 사랑으로 따르지 못하는 사람이고,
주님을 따르기보다 가고 싶은 곳이 따로 있는 저인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주님도 사랑치 않고 가고 싶은 곳도 다른 곳이라면
결코 주님을 따르지 않을 것이고
자기를 버리는 것이나 십자가를 지는 것은 더더욱 불가한 일이지요.
그렇다면 지금 나는 무엇인가?
내가 천주교를 믿고 수도자가 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주님을 사랑치도 않고, 주님을 따르고 싶지도 않다면
나는 과연 주님을 믿는 것인가, 천주교를 믿는 것인가?
현세 행복을 위해서 믿는가, 영원한 생명을 위해 믿는가?
그러므로 주님을 사랑치도 않고 그래서 주님을 따르기 위해
자신을 버리는 것이나 제 십자가 지는 것도 싫다면
우리는 오늘 베드로처럼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주님을 사랑한 사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따른 것도 틀림이 없지만 주님을 사랑한 것이
현세에서 자기에게 행복을 줄 분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와 수난의 길을 가시겠다는 주님을 말렸는데
주님께서 그 길을 가신다면 자기도 똑같이 그 길을 가거나
주님을 따름으로서 얻으려던 이 세상 부귀영화를 포기해야 했기 때문이지요.
나는 베드로와 다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