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하여라, 너희가 겉은 다른 사람들에게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
우리 중에 위선자가 아닌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정도가 심한 중증과 정도가 약한 경증의 차이만 있을 뿐
저 사람에게는 거짓이 없다고 칭찬을 받은 나타나엘처럼
정말 거짓과 위선이 없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위선자는 불행하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시니
위선자인 우리는 어느 정도 다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위선자인 우리는 지금 정말 불행합니까?
위선자이니 나는 불행하다고 생각하거나 불행한 줄을 압니까?
불행한 줄도 모르고 행복하다고 착각하기에 더 불행한 것은 아닙니까?
아마 우리는 위선자이기에 위선자라는 것을 눈감고 보지 않으려 하고
내가 불행하다는 것도 감추는 그런 위선도 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그리고 불행도 위선적으로 감춤으로써 행복할 기회를 놓쳐 불행할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행복할 수 있는 길은 먼저
자신의 위선을 깨닫고 자신의 불행을 솔직히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으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왜 우리는 위선을 하게 되고
위선하면 왜 불행한지 깨달아 아는 것입니다.
위선이란 선이 없는데도 있는 것처럼 겉꾸밈을 하는 것인데
자기 안에 선이 없어도 그런 자신에게 만족을 하거나
적어도 불만이 없다면 굳이 위선을 하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 위선자는 선이 없는 가난한 자신을 결코 사랑할 수 없는 것이고
선이 없는 자신을 사랑치 않기에 아담과 하와처럼 선을 욕심내는 것이며
하느님이 은총으로 주시는 선을 욕심으로 소유함으로써
오히려 죄와 악을 소유케 되는데 그것이 부끄러워 숨기는 것이 위선이고,
죄와 악을 숨기려다가 관계의 단절이 생기는 것이 위선의 불행입니다.
그러므로 위선의 근본원인은 선이 없는 자신의 가난을
겸손하게 인정치 않는 것이고 가난한 자신을 사랑치 않는 겁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보시기에 좋은 자신을 굳이 악으로 만드는 것이고,
욕심을 부림으로써 본래 선인 자신 안에 죄와 악을 가득 채우고는
그 안의 죄와 악을 감추고 좋게 보이도록 겉꾸밈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하느님 보시기에는 좋은 자기 몸을
더럽다, 추하다, 악하다고 생각하고는
아담과 하와처럼 화려한 옷으로 겉꾸밈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옷이란 것이 본래 그렇듯 단절입니다.
위선은 위선이 드러날까 봐 두려워하고 두려움이 단절을 낳는 것입니다.
우선 이 위선의 두려움은 아담과 하와의 예에서 보듯이
하느님으로부터 도망치고 자기 몸을 숨기게 하는데
하느님은 그것을 꿰뚫어 보시기에 하느님과 단절합니다.
이렇게 위선의 두려움은 하느님 앞에서는 위선을 숨길 수 없으니
하느님 앞에 있지 않고 숨기는 것이 통하는 사람들 앞에 있게 하지만
그럼에도 혹시 위선이 드러날까 전전긍긍하게 하며
자신의 위선을 꿰뚫어볼 것 같은 사람이나
들통이 나면 안 되는 사람에게는 하느님에게서처럼 도망치거나 단절합니다.
하느님 앞에 있지 못하게 하는 근원적인 불행,
사람들과도 단절케 하는 두려움의 불행이 위선의 결과이고,
그래서 위선자는 불행함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