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포르치운쿨라 행진을 하면서 영해 읍을 지나는데
읍내로 들어서니 경축 현수막이 여러 곳에 걸렸습니다.
그 지역 출신의 축구감독이 국가대표 감독이 되었는데
그것을 경축하는 현수막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그래도 현수막을 걸만큼 경축의 사건이지만
어느 시골에서는 자기 동네 사람이 조합장에 당선된 것도
축하한다며 현수막을 걸곤 하여 저는 속으로 웃곤 합니다.
이렇듯 웬만하면 자기 고향에서 뛰어난 인물이 나오면
마치 자기가 영광스런 듯 기뻐하고 자랑하기 마련인데
오늘 예수님의 경우는 예수님의 지혜와 기적에 대해
놀라워하면서도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왜 그럴까요?
한 마디로 예수님이 자랑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인간적인 것이었으면 자랑스러울 텐데 인간적인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고,
복음 여러 곳에서 예수님이 미쳤다거나 마귀에 사로잡혔다고
의심을 받는 것처럼 자기들 상식과 기준에 비추어 볼 때 비정상적입니다.
지혜롭기는 한데 그리고 기적을 인정하지 않을 수는 없는데,
다시 말해서 이 지혜와 기적의 힘이 인간에게서 나온 게 아님은 분명한데
이것이 하느님에게서 나온 것 같지는 않기에
이 지혜와 기적의 힘이 어디서 온 것인지 의구심을 품는 것이고,
그런 차원에서 못마땅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고향사람들은 예수님의 지혜와 기적이
하느님에게서 온 것이라는 것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너무도 분명합니다.
마리아와 요셉의 아들일 뿐 아니라 코흘리개 어릴 때부터 알기 때문이고,
그렇게 알아온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거나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언자일 리는 없다고 믿는 것입니다.
믿음, 그것도 하느님과 신적인 영역을 믿는 것이란 모르는 것을 믿는 것,
더 정확히 말하면 일부 아는 것을 가지고 모르는 것까지 믿는 것인데
자기의 앎을 넘어서는 신적인 영역을 자기가 아는 것을 가지고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리아와 요셉에게서는 하느님의 아들이 나올 수 없다고 믿는 것이고,
마리아와 요셉의 아들에게서 나오는 지혜와 기적의 힘은
하느님에게서 나온 것일 리가 없다고 믿는 것입니다.
불가능을 모르시는 하느님의 전능하심과 뭣이든 가능하심을
인간의 유한함과 불가능 안에 가두는 짓이지요.
사실 모든 의심과 불신이 다 이런 것입니다.
인간의 유한성 안에 신적인 가능성을 가두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성사를 보지 못하고,
하느님의 역사하심과 기적들을 알아채지 못합니다.
그제 제가 행진 후 저의 슬픔에 대해서 말씀드렸지만
사실 이번 행진에서 저나 행진단은 얻어먹고 자는 것과 관련하여
기적과 같은 일, 다시 말해서 하느님의 섭리를 많이 체험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지만 그런 일이 일어났고
그래서 기적과 같은 일이라고 그리고 하느님의 섭리라고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 없는 사람은 그것을 우연의 연속이라고 하겠지만
신앙인이라면 알 수 없고, 이해할 수 없고,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날 때
의심을 하기보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섭리가 아닐까 생각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