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마라.”
오늘 독서로 오랫동안 들은 창세기 얘기가 끝이 나고
그 이야기가 야곱과 요셉의 얘기로 끝이 납니다.
그런데 아버지 야곱이 죽자 요셉의 형제들은 자신들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다시 두려움에 빠지게 됩니다.
“요셉의 형들은 아버지가 죽자, ‘요셉이 우리에게 적개심을 품고,
우리가 그에게 저지른 모든 악을 되갚을지도 모르지.’ 하였다.”
요셉이 자기들을 용서하고 잘 해준 것이 하느님 때문인데
자기들의 아버지 야곱 때문에 용서하고 잘 해준 거라 생각한 겁니다.
자기가 이스라엘로 팔려온 것이 이스라엘 공동체를 구하기 위해
하느님이 하신 거라고 자기는 이해한다고 요셉이 앞서 말했음에도
아버지 하느님 때문이 아니라 아버지 야곱 때문에 그런 거라고 믿고,
하여 결과적으로 하느님의 역사하심과 요셉의 선의도 의심한 겁니다.
제 생각에 인간의 모든 두려움은 근본적으로
하느님의 사랑과 선의와 능력에 대한 불신 내지 의심에서 비롯됩니다.
사람이 두려운 것도 사람이 못된 사람이기에 두려운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대한 불신과 의심에서 비롯되고,
사람 중에서도 어떤 사람이 두려운 것은 그 사람이 악해서가 아니라
하느님께 대한 불신과 의심에서 비롯되며,
병과 죽음의 두려움과 미움과 상처의 두려움도 근본적으로는 다
하느님의 사랑과 선의와 능력에 대한 불신과 의심의 결과입니다.
그러니 신앙인인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한다면
비 신앙인의 두려움이요, 불신앙의 두려움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도 주님께서는 세 번이나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는데
두려움 앞에 너 혼자 있는 것이 아니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또 다른 측면에서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앞에서 모든 두려움은 불신앙의 두려움이라고 했는데
여기서 불신앙이란 하느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것을 믿지 못하는 불신앙이고
그래서 달리 말하면 하느님께서 함께 계심을 모르는 외로움의 두려움입니다.
어두운 밤길을 갈 때 혼자 가면 그 어둠이 무척 무섭습니다.
그런데 아이의 손이라도 잡고 가면 한결 두려움이 가십니다.
강도가 나타나면 실제적으로는 아이가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고
오히려 내가 그를 보호해야 하지만 감정적으로는 두려움이 가시는 것입니다.
우리말에 가신다는 말이 참 재미있습니다.
‘피로가 가시다.’ ‘아픔이 가시다.’ ‘두려움이 가시다.’ 이런 표현을 쓰는데
가서 없어진다는 뜻에서, 가니까 사라진다는 뜻에서 이 말이 나왔을 겁니다.
그러니까 손자의 재롱을 보면 육체적인 피로가 확 가신다고 하는 것은
육체적인 피로는 여전히 있지만 피로의 감정은 재롱으로 확 가시는 것,
다시 말해서 가고 없어진다는 뜻입니다.
아무튼 두려움은 두려움의 대상이 있기에 내게 생기는 것 같지만
그 두려움 앞에 나 혼자 있다고 생각하기에 생기는 것이며,
그러므로 혼자가 아니라 누구라도 있으면 두려움은 가시고,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면 확 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모함과 모욕도 너만 당하는 것이 아니라
나도 당하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고,
폭군보다 더 힘센 하느님께서 계시니 두려워 말라고 하시며
참새보다 우리를 더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 계시니 두려워 말라고 하십니다.
이런 관점에서 사실 죽는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고독사가 두려운 것이고, 그 고독도
옆에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라 하느님 없는 고독사가 두려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