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Utopia를 꿈꿉니다.
어느 한 사람 불행한 사람이 없이 모두가 잘 사는 나라말입니다.
성 토마스 모어는 이런 꿈을 펼친 “Utopia”라는 책을 썼고
홍 길동은 부조리와 서얼차별이 없는 이상 국가를 이루려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이상적인 나라를 모두 꿈꾸지만
이것이 가능할지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이 의구심을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상적인 공동체를 이룬다는 것이
그만큼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말이 쉽지 이상적인 국가나 공동체는 어찌 보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왜냐 하면 모든 것이 다 바뀌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즘 같은 선거철에는 정치가들이 모든 것 다 바꾸겠다고
공약을 내거는데 그러나 실제로는
公約이 公的인 約束이 아니라 빌 空자 空約이 되고 맙니다.
칼 막스가 노동자의 천국을 만들겠다고 사회주의를 들고 나오고
그래서 공산주의 세상이 등장했지만 공산주의도 실패했습니다.
그런데 칼 막스가 이루고자 했던 그 아름다운 공동체,
유토피아가 바로 오늘 제 1독서에서 소개되고 있습니다.
신자들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합니다.
재산과 재물을 팔아 모든 사람에게 저마다 필요한 대로 나누어 주어
가난한 사람도 없고 부유한 사람도 없습니다.
날마다 한마음으로 성전에 모입니다.
저의 가족 자랑이 되는 것 같아서 좀 쑥스럽지만
제가 미국에 있을 때
“생활 성서”에서 저희 집을 특집으로 다루었습니다.
그 이유는 저의 형제들이 매일 같이 만나서 기도하고,
그리고 같이 식당을 운영하고
식당 이익금으로 좋은 일을 좀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생활성서가 특별히 주목한 것은 좋은 일을 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같이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기도를 같이 하고, 일을 같이 하는 것,
이것이 보기에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형제들끼리 이렇게 지내는 것 당연한 것인데
이것을 특별히 소개하는 것 자체가 어찌 보면 우리 사회가 얼마나
비정상인지를 말해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실상 마음이 맞지 않으면
아무리 열심한 사람도 같이 기도하지 않고 혼자 기도하고
아무리 착한 사람도 같이 지낼 수 없고, 같이 일할 수 없고,
같이 좋은 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사도행전이 전하는 한 마음 한정신이 된다는 것,
아무도 자기 재산을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했다는 것은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런데 이것을 가능케 한 것이 바로 부활체험입니다.
오늘 두 번째 독서에서 베드로 사도는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크신 자비로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하시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우리에게 생생한 희망을 주셨다.”고 얘기합니다.
부활은 다시 태어난다는 의미도 있지만
새롭게 태어난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당신을 배반하고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는 제자들에게
평화를 빌어주시고 성령을 불어넣어 주시고
이어서 용서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주님을 잃은 슬픔 때문에
주님을 배반한 죄책감 때문에
주님을 잃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는 절망감 때문에
평화로울 수 없는 제자들을 먼저 용서하심으로써 평화를 주십니다.
이 용서가 제자들을 새 사람 되게 한 것입니다.
우리는 눈물 쏙 빠지게 혼을 내주어야 정신 차리고
새 사람 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진심 어린 사랑의 질책도 새 사람 되게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용서가 새 사람 되게 하는 것입니다.
용서란 과거를 풀어주고 과거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용서하든, 아니면 남을 용서하든
용서하는 사람도 용서 받는 사람도 과거에서부터 해방되는 것이고,
과거로부터 해방되는 사람이라야 새 삶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용서로 나를 채우고 있던 지난날의 미움들을 모두 비워내고
용서로 표현되는 사랑으로 나를 채울 때,
미움으로 분열되고 갈등하던 것이
이제는 사랑으로 화합하고 일치합니다.
그리고 사랑으로 충만하기에 내 것을 다 주어도 충만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주님의 용서로
새롭게 다시 태어나는 체험을 한 사람은 이제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도 전하고 공유합니다.
어느 한 사람 불행한 사람이 없이 모두가 잘 사는 나라말입니다.
성 토마스 모어는 이런 꿈을 펼친 “Utopia”라는 책을 썼고
홍 길동은 부조리와 서얼차별이 없는 이상 국가를 이루려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이상적인 나라를 모두 꿈꾸지만
이것이 가능할지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이 의구심을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상적인 공동체를 이룬다는 것이
그만큼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말이 쉽지 이상적인 국가나 공동체는 어찌 보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왜냐 하면 모든 것이 다 바뀌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즘 같은 선거철에는 정치가들이 모든 것 다 바꾸겠다고
공약을 내거는데 그러나 실제로는
公約이 公的인 約束이 아니라 빌 空자 空約이 되고 맙니다.
칼 막스가 노동자의 천국을 만들겠다고 사회주의를 들고 나오고
그래서 공산주의 세상이 등장했지만 공산주의도 실패했습니다.
그런데 칼 막스가 이루고자 했던 그 아름다운 공동체,
유토피아가 바로 오늘 제 1독서에서 소개되고 있습니다.
신자들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합니다.
재산과 재물을 팔아 모든 사람에게 저마다 필요한 대로 나누어 주어
가난한 사람도 없고 부유한 사람도 없습니다.
날마다 한마음으로 성전에 모입니다.
저의 가족 자랑이 되는 것 같아서 좀 쑥스럽지만
제가 미국에 있을 때
“생활 성서”에서 저희 집을 특집으로 다루었습니다.
그 이유는 저의 형제들이 매일 같이 만나서 기도하고,
그리고 같이 식당을 운영하고
식당 이익금으로 좋은 일을 좀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생활성서가 특별히 주목한 것은 좋은 일을 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같이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기도를 같이 하고, 일을 같이 하는 것,
이것이 보기에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형제들끼리 이렇게 지내는 것 당연한 것인데
이것을 특별히 소개하는 것 자체가 어찌 보면 우리 사회가 얼마나
비정상인지를 말해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실상 마음이 맞지 않으면
아무리 열심한 사람도 같이 기도하지 않고 혼자 기도하고
아무리 착한 사람도 같이 지낼 수 없고, 같이 일할 수 없고,
같이 좋은 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사도행전이 전하는 한 마음 한정신이 된다는 것,
아무도 자기 재산을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했다는 것은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런데 이것을 가능케 한 것이 바로 부활체험입니다.
오늘 두 번째 독서에서 베드로 사도는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크신 자비로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하시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우리에게 생생한 희망을 주셨다.”고 얘기합니다.
부활은 다시 태어난다는 의미도 있지만
새롭게 태어난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당신을 배반하고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는 제자들에게
평화를 빌어주시고 성령을 불어넣어 주시고
이어서 용서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주님을 잃은 슬픔 때문에
주님을 배반한 죄책감 때문에
주님을 잃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는 절망감 때문에
평화로울 수 없는 제자들을 먼저 용서하심으로써 평화를 주십니다.
이 용서가 제자들을 새 사람 되게 한 것입니다.
우리는 눈물 쏙 빠지게 혼을 내주어야 정신 차리고
새 사람 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진심 어린 사랑의 질책도 새 사람 되게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용서가 새 사람 되게 하는 것입니다.
용서란 과거를 풀어주고 과거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용서하든, 아니면 남을 용서하든
용서하는 사람도 용서 받는 사람도 과거에서부터 해방되는 것이고,
과거로부터 해방되는 사람이라야 새 삶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용서로 나를 채우고 있던 지난날의 미움들을 모두 비워내고
용서로 표현되는 사랑으로 나를 채울 때,
미움으로 분열되고 갈등하던 것이
이제는 사랑으로 화합하고 일치합니다.
그리고 사랑으로 충만하기에 내 것을 다 주어도 충만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주님의 용서로
새롭게 다시 태어나는 체험을 한 사람은 이제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도 전하고 공유합니다.
눈물겹습니다. 다시는 죄 짓지 말라 !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