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솔직히 저나 우리 인간 입장에서 삼위가 일체이신 것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하느님이 한 분이시라는 그 교의도 별 의미가 없습니다.
하느님이 한 분이건 아니건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사랑이 아니라면 한 분이신 것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며,
우리를 구원하시는 사랑이 아니라면 당신끼리 사랑이시고
그래서 사랑으로 하나가 되신다한들 그것이 우리와 무슨 상관입니까?
이는 마치 어미아비가 서로 너무도 사랑하고 완전한 일치를 살아가지만
자기 자식은 어떻게 되든 신경 쓰지 않는 거나 마찬가지지요.
매주 사랑여행을 다니며 애들은 굶든지 먹든지 팽개치고 다니는 겁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가 우리를 구원하는 사랑이 아니라면
삼위일체 교리는 매우 건조한 이론일 뿐이고, 그래서
이 축일을 지내는 것은 강론을 통해 교리공부 하는 것, 그 이상이 아니기에
이런 축일을 우리가 기뻐하거나 감동하거나 감사하거나 할 이유도 없겠지요.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삼위일체의 사랑으로 우리를 창조하시고
삼위일체의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프란치스코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오, 사람이여, 주 하느님께서 육신으로는 사랑하시는 당신 아들의 모습대로,
그리고 영으로는 당신과 비슷하게 그대를 창조하시고 지어내셨으니
주 하느님께서 그대를 얼마나 높이셨는지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나 우리를 영광스럽게 창조하신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을
우리 인간은 죄로 깔아뭉개고 덕분에 인간은 비참해졌습니다.
집 떠나면 고생이라고 했지만 실은 하느님의 사랑을 떠나 고생인 것이지요.
그런데 삼위일체의 하느님 사랑은 창조보다도 구원에서 더 잘 드러나지요.
이렇게 당신을 떠나 비참해진 인간을 하느님 사랑은 심판으로 벌하지 않고
아드님을 구원자로 보내심으로 더 큰 사랑을 보여주셨지만
창조의 사랑을 거부한 인간은 구원의 사랑마저도 거절하고
구원자를 십자가에 못 박아 돌아가시게 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뉘우치게 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 사랑임을 깨닫게 하시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사랑을 사랑으로 느끼게 하는 사랑이 성령이신 겁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성령의 사랑 사이에는 고통이 있지요.
고통이란 사랑을 배반하고 그래서 사랑을 잃은 것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사랑 불감증을 치료하는 사랑의 묘약이요 성령의 치료제이고,
사랑을 사랑으로 느끼게 하는 하느님 사랑의 도구입니다.
그러니 삼위일체의 사랑은 가히 총력적인 사랑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런 하느님의 사랑에 우리는 어떻게 응답해야 하겠습니까?
이에 대해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형제 여러분, 기뻐하십시오. 자신을 바로잡으십시오.
서로 격려하십시오. 서로 뜻을 같이하고 평화롭게 사십시오.
그러면 사랑과 평화의 하느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실 것입니다.”
우선 우리는 개인적으로 기뻐하고 자신을 바로잡는 것입니다.
구원 받았음을 기뻐하는 것이고,
사랑 불감증이 치유되어 사랑을 사랑으로 느끼게 된 것을 기뻐하는 겁니다.
다음으로 이웃과의 관계에서 사랑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지친 사람을 격려해야 하겠지만 무엇보다도 사랑을 살자고 격려하고
하느님의 뜻을 같이 이루어나가기로 뜻을 같이 두고 서로 격려하는 것이고,
그럼으로써 평화롭게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 때 사랑과 평화의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실 거라고
바오로 사도는 말하는데 사실 이것은 기원이자 축복입니다.
삼위일체 대축일에 우리는 하느님의 총력적인 사랑을 느끼고
그 사랑을 살아가기로 다시 한 번 다짐하도록 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