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토빗은 마음이 몹시 괴로워 탄식하며 울었다.
그리고 탄식 속에서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목을 매는 것보다는, 평생 모욕하는 말을 듣지 않도록
죽게 해 주십사고 주님께 기도하는 것이 낫겠다.”
토빗이 웁니다.
왜 웁니까?
울음에는 몇 가지가 있습니다.
이별의 슬픔 때문에 우는 울음
비참한 현실을 보고 슬퍼 우는 울음
억울함에 북 바쳐서 우는 울음
너무 감동하여 우는 울음
너무 기뻐서 우는 울음
이 여러 가지 이유 중에서 토빗의 울음은 두 가지,
곧 비참한 자신에 대한 슬픔과 억울함이 합쳐진 울음이라고 생각되는데
이렇게 울음이 여러 가지여도 제 생각에 울음의 공통점은
슬픔이든 억울함이든 감동이든 기쁨이든 가득차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웬만큼 슬프거나 웬만큼 기쁘면 울음이 나오지 않고
웬만큼 억울하고 웬만큼 감동해서는 울음이 나오지 않는 법인데
아무튼 울음은 가득차서 터져 나오는 것이기에 다른 것을 몰아내고
그래서 어떤 때 울고 나면 속이 시원한 것이 바로 이런 이치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이유로 제가 토빗처럼 울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억울함과 그로 인한 분노와 미움을 안고 속으로 혼자 끙끙 앓거나
반대로 자신을 그렇게 만든 상대에게 화살을 돌려 이를 갈지도 말고
자신을 있는 그대로 관조하며 눈물 흘리는 것이 훨씬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억울해하고 미워하고 분노하는 것은 자기 몸과 마음을 상하게 할뿐,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고 탓을 밖으로 향함으로
안으로부터 자신을 바꾸고, 치유하는 것을 불가능케 하지요.
아무튼 운다는 것은 이렇게 치유의 효과가 있는데
그런데 오늘 토빗은 혼자 우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 울고,
그럼으로써 울음이 기도가 되게 합니다.
저는 그런 경우가 거의 없지만 어떤 분들은 울음을 참고 참다가
울음을 터트릴 수 있는 딱 한 사람을 만나자 울음을 터트립니다.
그런데 우리 신앙인에게는 하느님이 그런 분이 아닐까요?
오늘 토빗은 하느님 앞에서 한없이 낮아지고 죄인이 됩니다.
“나 토빗은 평생토록 진리와 선행의 길을 걸어왔다.”고 했던 토빗이었건만
가장 가까운 아내마저 자기를 몰라주자 한없이 약해지고 무너져버립니다.
사실 가장 가까운 사람이 상처를 주는 것이고,
가장 가까운 사람이 힘도 주지만 무너지게도 합니다.
오로지 그에게 의지하여 자신을 지탱해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인간에 의존하다가 무너졌을 때,
그때 하느님 앞으로 나오고 하느님께 울며 기도하게 되고,
그리고 이때 평생 선행과 자선에 충실했어도 죄인이라고 하는 토빗처럼
비로소 죄인임을 인정하며 겸손해지고,
죽고 싶을 정도로 괴로운 이 상황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이런 상황에서 구차하게 살기보다는 차라리 죽게 해달라고 청하게 됩니다.
사실 나의 모든 것을 아시는 하느님 앞에서는
우리가 별 짓을 다 할 수 있고, 그것이 가장 진실한 기도입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해서 얘기합니다. 그것이 가장 진실한 기도입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위선을 떨지 말고
나 그대로를 드러내는 것이 기도이고, 가장 진실한 기도입니다.
그래서 자기 처지를 보며 울며 바치는 기도가 가장 진실한 기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