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이러면 안 되는데
‘이제 드디어 부활시기가 끝나는구나. 휴!’하게 됩니다.
오늘로 부활시기가 끝나는데 매일 강론을 올리는 제게는
이 부활시기가 꽤나 길고, 버겁고, 부담스럽게 느껴졌지요.
그런데 사실 부담을 준 것은 주님의 부활이 아니라
부활시기 내내 읽었던 요한복음이었습니다.
그래야지요. 주님의 부활이 부담이 되면 안 되지요.
아시다시피 공관복음에는 주님의 말씀과 행적이나 사건이 고루 있지만
요한복음은 거의 모든 분량이 주님의 말씀으로 채워져 있고,
그 내용도 심오하고 중첩과 반복이 계속 되어 매일의 강론이 힘든 거지요.
그런데 요한복음은 공관복음과 또 다른 면에서 차이점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은근히 베드로와 요한 사도를 비교한다는 점입니다.
누가 더 주님의 사랑을 받았는지,
누가 더 주님을 더 사랑하는지 경쟁적인 시각으로 묘사하고 있는 겁니다.
예를 들어 부활하신 주님에 대한 얘기를 여인들로부터 듣고
베드로와 요한 사도만 무덤으로 달려가는 얘기가 있는데
이것은 요한복음과 루카복음에만 있고 다른 공관복음에는 없으며
루카복음에서도 베드로 사도만 무덤에 간 거로 나옵니다.
“사도들은 그 여자들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으로 달려가서 몸을 굽혀 들여다보았다.”
그러니까 요한 사도는 여인들의 말을 듣고도 가지 않은 것인데
요한복음에서는 같이 간 것으로 나오고 요한사도가 더 빨리 달려갔지만
무덤 안으로 먼저 들어가는 것은 베드로에게 양보하는 거로 묘사합니다.
이 복음의 저자가 요한 사도이기에 이렇게 묘사하는 것일까요?
그런 것일지 모르지만 아무튼 오늘 복음의 얘기도
베드로 사도와 요한 사도가 얽혀 있습니다.
어제 주님을 따르다 순교하게 될 거라는 말씀을 들은 베드로 사도가
그러면 주님의 사랑을 받는 요한 사도는 어찌 될지 묻자
약간은 질책성이 있는 말씀을 주님께서 하시지요.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혹시 베드로 사도가 자기만 수난을 당하고 경쟁관계인
요한 사도는 수난을 당하지 않는 것은 아닌지 궁금해 한다는 뉘앙스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베드로와 요한 사도가 실제로 이렇게 사랑의 경쟁관계였고,
오늘 주님 말씀도 경쟁하지 말라고 나무라는 말씀이고,
그저 당신을 따르라고 베드로 사도에게 하신 말씀이겠습니까?
그런 것이기보다는 요한복음의 독자인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지요.
사랑을 놓고 서로 경쟁하는 우리에게, 그래서
쟤는 고통 받지 않는데 나만 고통 받는 것은 아닌지 민감한 우리에게
하시는 주님 말씀이고 오늘 복음일 것입니다.
우리는 고통을 겪을 때 종종 주님의 사랑과 연결시킵니다.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나?
사랑하지 않으시기에 고통을 주시는 것은 아닐까?
다른 사람은 사랑하시기에 고통을 안 주시고 나만 주시는 것은 아닐까?
이런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상관치 말라고 하십니다.
고통을 친구 안젤라와 비교하지 말고,
주님의 사랑을 요셉과 비교하지 말며
안젤라는 안젤라대로 주님을 따르고,
요셉 너는 너대로 주님을 따르라는 말씀입니다.
사랑과 수난의 길에는 옆을 볼 이유가 없다는 말씀이고,
주님을 놓치지 않으려면 옆을 볼 여유도 없다는 말씀이며,
다른 데 힘을 낭비치 말고, 온 힘을 다 쏟아 따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로서 사도행전도 끝이 나는데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를 비롯한 사도들은
시편의 노래처럼 다른 곳에 정신 팔지 않고 주님을 충실히 따른 분들입니다.
“주님의 산에 오를 이 누구인고?
그 손은 깨끗하고 마음 정한 이, 헛 군데에 정신을 아니 쓰는 이로다.”
베드로 사도와 요한 사도와의 사랑 구도~~
과연 예수님은 누구를 더 사랑하셨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