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소주일, 우리의 부르심에 대해서 성찰하고 기도하는 날입니다.
그런데 복음에서 부르심에 대해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과
독서들에서 얘기하는 베드로 사도의 말이 사뭇 다르게 들립니다.
주님의 말씀은 양을 풀밭으로 부르시어 먹게 하시고
또 우리로 부르시어 안전하고 편히 쉬게 하시는 목자의 부르심인데
베드로 사도의 말은 고난을 받게 하시는 야훼의 종의 부르심입니다.
한 마디로 언뜻 듣기에는 주님의 부르심은 따듯하고 평화로운데
베드로 사도가 얘기하는 부르심은 비장하고 처절합니다.
말하자면 피를 철철 흘리며 따라야 하는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목자와 양의 비유를 새겨들으면 결코 다르지 않습니다.
목자가 이끄는 곳이 이 세상의 푸른 풀밭이 아니라 천상이고
목자의 문도 양이 우리를 드나들 때 거치는 문이 아니라
이 세상을 떠나 천국에 들어갈 때 거치는 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 사도가 얘기하듯 우리의 목자이신 주님께서
따르라고 본보기를 남겨주신 그 모범을 따라야 하는데 그것은 이렇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선을 행하는데도 겪게 되는 고난을 견디어 내면,
그것은 하느님에게서 받는 은총입니다.
바로 이렇게 하라고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겪으시면서,
당신의 발자취를 따르라고 여러분에게 본보기를 남겨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따라가야 할 첫 번째 길은 선행의 길입니다.
그런데 베드로 사도에 의하면 선행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은총이며
은총을 받은 사람이라야 선행을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선행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총인지,
그것부터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선한 마음만 먹으면 선행을 할 수 있다고 생각지만
선의를 가지는 것 그 자체가 사실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경험적으로 압니다.
선을 행하려고 마음을 먹고 애를 쓰지만 내 안에 미움이 더 많고
그래서 악의가 마음 안에 가득하면 내 안에 있는
그 보잘 것 없는 선의는 악의 앞에서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합니다.
가진 것이 있어야 줄 수 있듯 선행도 선의가 있어야 할 수 있는데
선의란 하느님 사랑으로 충만한 사람이 지닐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주님을 따른다면 우리도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선행을 하는데도 고난을 겪게 됨에 대해서 말하는데
우리가 어렸을 때 선행 상을 받은 추억 때문에 그런지 모르지만
선행을 하면 상을 받고 칭찬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만
우리의 실제 삶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런데 상이나 칭찬을 받기 위해 선행을 하는 위선자가 아니라면
우리는 선행을 할 수 있는 것 그 자체가 은총이라 생각하며 선행을 하고,
상급을 받고자 한다면 하느님께 상을 받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입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주님을 따른다면 우리도 인내의 길을 가야 합니다.
십자가의 길을 간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인내의 길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매조키스트(피학대증환자)가 아닌 한 고통을 즐기는 사람은 없고
그래서 무엇이 고통인 한 고통은 견뎌야만 하는 것입니다.
만약 누가 고통을 견디지 않고 즐긴다면 그것은
다른 사람 보기에 고통이어도 사실은 고통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좋아서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고 사랑으로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이며
사랑으로 기꺼이 받아들였기에 사랑으로 견딜 수 있고 견디어내는 것입니다.
자식이 죽게 되었을 때 부모는 그 자녀를 위한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이지만
그 고통이, 고통이 아닌 것은 아니고, 쉽게 견디어낼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사랑의 힘으로 견디어낼 수 있는 것이지요.
결국 주님의 부르심을 따르는 우리의 길은 사랑의 길이며
주님을 따라 아버지 하느님께로 가는 천국의 길임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