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는데,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얘졌다.”
오늘 창세기의 하느님은 살던 곳에서 떠나 당신이 알려줄 곳으로 가라시며
가는 곳마다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시고 복이 되게 하겠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당연히 질문이 나옵니다.
사는 이곳에서 복을 주시지 왜 떠나 간 그곳에서 복을 주시는가?
오늘 복음의 주님은 그 아름다운 타볼산에서 당신의 빛나는 모습을
베드로를 비롯한 특별히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보여주시지만
이곳에서 계속 지내자는 베드로와 제자들의 청을 물리치고 내려오십니다.
그래서 당연히 질문이 나옵니다.
그냥 내려올 거면 왜 제자들을 데리고 올라가셨고 변모를 보여주셨을까?
아브라함이 떠나고 주님과 제자들이 내려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지금 여기(Hic et Nunc, Here and Now)는 아무리 좋고 아무리 평안해도
떠나야 할 곳이라는 거고, 참 행복과 참된 영광은 지금 여기가 아니라
미래 언젠가 도달할 곳에서야 성취되는 것이라는 뜻이겠지요.
기실 지금 여기는 내가 영원히 있을 곳이 아니고 싫든 좋든 떠나야 합니다.
우리 인생이 본래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의 어느 순간은 참 행복하여 영원히 이랬으면 할 때가 있고,
다른 어느 순간은 너무도 고통스럽고
그 고통이 영원할 것 같아 절망스러울 때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타볼산의 베드로처럼 너무 좋고 그래서 영원히 있고 싶은데
영원하지가 않아서 떠나게 되거나 떠나야 하고,
해골산의 주님처럼 너무 괴롭고 그래서 빨리 끝장나기를 바라는데
끝장 날 것 같지 않아서 절망스럽지만 그 또한 지나가고 떠나갑니다.
우리 인생이라는 것이 타볼산의 때도 있고 해골산의 때도 있다는 것이며
타볼산에서 해골산으로 가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며
해골산에 있을 때 타볼산을 기억하라는 것이 오늘 복음이 뜻입니다.
그래서일 겁니다. 우리말에 인생은 가는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그저 삶을 산다고 하지 않고 삶을 살아간다고 하고,
그저 죽는다고 하지 않고 죽어간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신앙은 가기는 가되 구원으로 가는 거라고 바꿔 얘기하지요.
살아가는 것은 물론이고 죽어가는 것도 구원으로 가는 거라고 얘기하고,
살아가는 것도 구원으로 가는 것이어야 살아가는 것이지
구원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면 살고 있는 것 같지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실은 죽어가는 거라고 얘기합니다.
이에 대해서 바오로 사도는 오눌 이렇게 얘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행실이 아니라 당신의 목적과 은총에 따라
우리를 구원하시고, 거룩히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고 부르시는 분이신데
구원을 위한 그분의 부르심에 우리가 따르면 구원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고향으로부터 불러내신 것도 구원을 위한 것이고,
복을 주시고 복이 되게 하겠다고 하신 것도 아브라함에게 구원을 주시고
아브라함이 다른 이에게 구원이 되게 하시겠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씀드리고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세상 사람들이 행복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 신앙인에게는 구원입니다.
아니 세상 사람들이 행복이라고 얘기하는 것이 실은 행복이 아니고
구원이 참 행복이며 구원 받은 사람이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나는 지금 행복하다, 나는 여기가 좋다고 생각되어도
구원을 위해서 타볼산의 주님과 제자들처럼 지금 여기를 떠나고
지금 너무 고통스럽고 절망스러울지라도 구원의 과정으로 받아들이고
주님과 함께 십자가와 죽음의 길을 가야 할 것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우리에게 이렇게 격려합니다.
“사랑하는 그대여,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