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얘야, 주님을 섬기러 나아갈 때, 너 자신을 시련에 대비시켜라.
네 마음을 바로잡고 확고히 다지며, 재난이 닥칠 때 허둥대지 마라.
주님께 매달려 떨어지지 마라.”
저는 오늘의 집회서를 어부가 고기 잡으러 나가는 것에 빗대어 읽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섬기러 나아갈 때”는 “고기 잡으러 나아갈 때”로 바꿔 읽고,
“너 자신을 시련에 대비시켜라.”는 “태풍 불 때를 대비하여라.”로 바꿔 읽고,
“주님께 매달려 떨어지지 마라.”는 “닻을 튼튼하게 내려라”로 바꿔 읽으니
그 뜻이 조금 실감나게 다가왔습니다.
그렇습니다.
놀러가는 것은 아무 준지하지 않아도 되고 즐기기 위한 준비만 하면 되지만
주님을 섬기러 나아가는 것은 집회서의 말씀대로 시련에 대비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예루살렘 입성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당신의 수난과 죽음에 대비하라고 재차 말씀하시는데
제자들은 예루살렘에 들어가면 누가 더 높은 자리에 오를지,
그러니까 염불에는 관심이 없고 잿밥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제가 자주 하는 얘기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미래를 대비하는 마음가짐에 대한 것으로서
하나는 <기대>이고, 다른 하나는 <각오>입니다.
<기대>는 선, 곧 좋은 것이 있을 거라는 마음가짐이고,
<각오>는 악, 곧 나쁜 것이 올 것을 대비하는 마음가짐인데
그런데 그 결과가 아주 큰 차이, 그야말로 천양지차天壤之差입니다.
한 번 그 차이를 보겠습니다.
큰 기대를 했는데 기대와 정 반대의 결과가 나옵니다.
예를 들어 대통령 탄핵을 했는데 탄핵이 헌재에서 기각됩니다.
그러면 탄핵을 찬성하던 많은 촛불 시민들은 어떻게 될까요?
오늘 집회서에서 재난이 닥칠 때 허둥대지 말라고 하는데
허둥대는 정도가 아니라 좌절감, 절망감, 허탈감과 같은 개인적이고
심리적인 붕괴는 물론 더 나아가 집단적 공황상태에 빠질 것입니다.
반대로 최악을 각오를 하면 그 결과는 어떨까요?
최악의 상황이 닥쳐도 이미 그것을 각오했기에 허둥대지 않고 침착할 거고,
최악이 아니고 차악의 결과만 나와도 다행이라고 할 것이며,
정 반대의 결과가 나오면 너무도 기쁘고 행복해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몸이 안 좋아 병원을 찾았더니 암이 의심된다는 말을 듣고
최악의 상황을, 그러니까 말기 암을 각오하였는데
말기 암은 아니고 초기라는 판정을 받으면 그나마 다행이라며 기뻐하고
전혀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면 날듯이 기쁘고 너무도 행복할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적인 일에도 최악을 각오하면 불행을 잘 관리하고
행복을 잘 살아갈 수 있는데 신앙적인 일에 신앙적으로 각오를 하면
더더욱 인생을 잘 살아갈 뿐만 아니라 영생을 잘 살아가게 되겠지요.
하느님의 일을 할 때 이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릴 거라는 기대는
아예 하지 않는 것이 좋고 반대로 안 좋은 것을 각오해야 하고
하느님의 더 큰 일을 하려고 하면 인간적으로는 최악을 각오해야 합니다.
단 각오가 그저 인간적인 각오가 아니라 신앙적인 각오를 해야 하는데
그것은 단지 시련만을 각오하는 것이 아니라
최악의 상황에서도 하느님과의 끈을 결코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와
실제로 시련이 오면 하느님께 더 굳건히 닻을 내리겠다는 결심과 함께
최악을 각오하는 것입니다.
박해시대 때 우리의 순교자들과 성인들이 신앙의 힘으로
순교를 각오하고 시련도 이겨낸 것과 같은 것이지요.
기대와 각오 중에서 어떤 마음가짐으로 사는 것이 인생과 신앙을
지혜롭게 사는 것인지 성찰하고 묵상하는 오늘이 되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