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창조한 사람들을 이 땅 위에서 쓸어버리겠다. 사람뿐 아니라,
짐승과 기어 다니는 것들과 하늘의 새들까지 쓸어버리겠다.”
몇 년 전 후꾸시마 원전사고가 났을 때 어느 목사님이 말하길
일본이 하느님을 믿지 않아서 그런 사고가 났다고 해서
논란이 됐던 적이 있고 저도 그런 생각이 어처구니없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생각은 하느님을 믿지 않는다는 그 목사님이 생각이
일본의 그리스도교 신자 비율이 너무 낮기에 그렇게 생각하는 게 문제이고,
자연현상이나 자연재앙까지 하느님의 벌로 생각하는 것이 문제라는 거지요.
그렇다면 천주교를 국교로 믿는 필리핀에 그리 많은 자연재해가 있는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겠습니까? 개신교를 믿지 않아서 그런 거라 하겠습니까?
그럼에도 그 목사님의 생각이 긍정적으로 이해되는 한 측면은
그런 생각이 세상사를 하느님과 무관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하느님 안에서 어떤 일을 보려고 하는 신앙의 자세,
하느님이 역사의 주인이시라는 신앙의 자세에서 나온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런 면에서는 개신교 신자들이 천주교 신자들보다 확실히 신앙이 투철하고
개신교 목사님들이 천주교 신부들보다 더 투철하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오늘 창세기의 노아의 홍수 얘기를 묵상하면서 이런 묵상을 한 것은
어제 제 친구로부터 받은 전화의 영향입니다.
제 친구의 딸아이가 교통사고가 나서 5일째 무의식 상태인데
기도를 부탁한다는 전화를 받고서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무슨 하느님의 뜻이 여기에 있는 것일까 한참 생각했었지요.
이 사고가 하느님의 뜻과 아무런 상관없는
그저 순수한 인간의 실수나 잘못뿐일 수도 있지만,
그리고 웬만한 일은 그저 인간사로 치부하고 넘어갈 수 있지만
이런 극단적인 사건 앞에서 인간은 하느님과 대면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노아의 홍수 얘기는 사실 인류의 수많은 홍수 얘기 중의 하나일 뿐이고
다른 홍수 얘기의 영향을 받은 것이기도 하지만
제가 생각하기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경험한 엄청난 자연재해와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인간의 죄를 연결시킨 것, 곧 신앙의 소산입니다.
우리는 정말 확 쓸어버리고 싶은 죄악과
그 죄악을 저지르는 인간들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죄악도 쓸어버리고 싶지만 무엇보다 그런 인간들을 쓸어버리고 싶습니다.
회개하기를 바라지만 회개를 바라고 기대하는 것이 전혀 무망할 때,
그것도 개인이 아니라 집단과 조직이 그렇게 사악하고 회개치 않을 때
결국 모든 것을 쓸어버리는 대홍수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고,
그 대홍수를 하느님께서 내리신 것이라고 신앙적으로 연결하는 거지요.
그런데 자연재앙을 하느님의 징벌로만 얘기한다면, 그것은
신앙적인 것일 수는 있어도 앞서 봤듯 올바른 신앙의 표현은 아닙니다.
모든 것을 쓸어버리고픈 인간의 분노와 증오의 마음을
신앙으로 포장하고 정당화하는 것뿐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노아의 홍수가 담고 있는 중요한 메시지는
악과 악인의 제거가 아니라 새로운 창조임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나라 시국은 여러분도 잘 아시듯이 탄핵과 특검 정국입니다.
그런데 우리들 가운데 그들에 대한 분노와 증오가 있고
그래서 이들이 어떻게 되는지 거기에만 온 신경이 쏠려있다면
그것은 노아의 홍수가 얘기하는 새로운 창조에는 이르지 못한 겁니다.
정말 감정을 넘어서 우리나라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재속 프란치스코 회에서 지금 우리나라를 위한 기도를 하기로 하였는데
이 기도지향처럼 하느님께서 우리나라를 새로이 창조해주시기를 기도하고
아울러 하느님께서 새로이 창조하시도록 우리는 노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