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세례자 요한이 하는 이 말이 지금 우리에게 하는 말이라면
지금 우리 가운데 우리가 모르는 분이 계신다는 얘기입니다.
우리 가운데 있지만 우리가 모르는 분이 있다?
우리 가운데 있는 사람 중에는 우리가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우리가 모르는 분이 있다니 그분은 누구인가?
그러니까 그분은 앞뒤의 맥락으로 보아 예수 그리스도이신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 모른다는 얘기도 되고,
우리 중에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지 모른다는 얘기도 됩니다.
우리는 예수가 어떤 분인지는 알지만
예수이신 그리스도, 곧 육화하신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 다는 모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앎 안으로 들어오신 분이기는 하지만
우리의 앎을 또한 넘어 계시는 분이시라는 얘깁니다.
쉽게 얘기하면 알지만 다 모르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분입니다.
이분은 세월이 지나면 다 알 수 있거나,
우리의 앎을 확장해나가면 알 수 있는 분이 아니니
우리의 앎을 확장할수록 많이 알게는 되어도
영원히 그분을 다 알 수는 없는 분이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분을 다 알려고 욕심 부려도 소용없고
그래서 그분을 지적 욕심의 대상으로 삼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분을 한없이 사랑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이제 우리 중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지 모른다는 측면도 한 번 보겠습니다.
이는 마치 우리와 같이 사는 사람 중의 한 사람이 왕자인데
우리는 그가 누구인지 모른다는 얘기와 같습니다.
제 기억이 정확치 않지만 들은 얘기가 있습니다.
형제들 간의 관계가 좋지 않은 어느 수도원에
아주 유명한 예언자가 길을 가다가 묵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예언자는 그 수도원 형제들 가운데
성인이 하나 있다는 얘기를 남기고 다음 날 떠났는데
이때부터 수도원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였습니다.
누가 성인인지 모르니 서로 모두에게서 장점을 찾기 시작하고,
모두 서로를 성인으로 대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서로를 존경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됐을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겠지요.
이렇게 다 모르는 존재가 있다는 것은 좋은 점이 있습니다.
다 안다고 하는 데서 항상 문제가 있습니다.
사람을 다 알 수 없다고 겸손하고,
하느님은 더더욱 다 알 수 없다고 겸손하면
하느님이 우리에게 어느 날 문득 나타나고
알지 못하는 우리 형제도 하느님이 되어 나타납니다.
아, 모름의 신비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