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오로 사도가 어제는 코린토 신자들과 자신이 세상의 육이 아니라
하늘에서 오는 영을 받았다고 하였는데 오늘은 코린토 신자들이
아직도 육적인 사람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아직도 육적인 사람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세례를 받은 우리지만 아직도 세속적이라는 말과 같은 뜻일까요?
같은 뜻이라고 생각이 되지만 설명은 좀 더 필요한 것 같습니다.
성령을 받았는데 왜 아직도 육적인가?
한 번 성령 받은 것으로 영적인 인간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지요.
성령이 쫓겨난다는 말을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성령은 붙박이장이 아닙니다.
성령은 들락날락하시는 분이고,
우리가 영접치 않고 심지어 쫓아내면 쫓겨나는 분이십니다.
싫다는데도 우격다짐으로 밀고 들어오는 분도 아니지만
나가라는데도 자존심도 없이 죽치고 있는 분도 아니라는 겁니다.
어제 봤듯 우리가 문을 꼭 닫아걸고 있지만 않으면
우리 안엔 성령이 들어올 수도 악령이 들어올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악령이 나간 뒤 집이 깨끗이 비어있는 상태로 있으니
나갔던 악령이 일곱 악령을 더 데리고 와 오히려 전보다
더 안 좋은 상태가 된다는 주님의 말씀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우리는 성령을 쫓아낼까요?
성령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거나 맛들이지 못해서일까요?
이와 관련하여 바오로 사도는 오늘 이상한 표현을 합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젖만 먹였을 뿐 단단한 음식은 먹이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지금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여기서 젖은 뭐고 단단한 음식은 뭡니까?
즉시 젖과 이유식과 어른들의 거친 음식이 연상됩니다.
젖은 아이가 처음 접한 음식이요 맛이고
그래서 아이는 이 맛에 길들여졌을 뿐 아니라
어른들의 거친 음식보다 위와 장이 소화하기 쉽습니다.
무엇보다 엄마의 몸에서 나오는 것이기에
엄마의 사랑이 직접 전달되고 엄마와 일체감을 느끼게 합니다.
이에 비해 어른의 음식은 엄마와의 이런 것들을 느낄 수 없게 할 뿐 아니라
엄마가 아닌 다른 사람이 해주거나 자기 스스로 해먹어야 하는 음식이고
무엇보다도 엄마와만 먹는 음식이 아니라 남과 먹어야 하고
맵기도 하고 짜기도 하고 소화하기 힘든 거친 것들입니다.
이것을 영적인 것에 대입을 하면 지금까지는
나에게 너무 따듯하고 잘해주는 사람만 있었고 처한 상황도 좋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사람만 있을 수 없고 상황도 좋지 않습니다.
그래도 맞닥뜨려야 하고 도전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경우는 성령의 인도로 광야로 나가셔야 했고
악령과 맞닥뜨려 대결을 해야 했고 그래서 그러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런 맞닥뜨림과 도전을 두려워하고 거부하는 사람은
고통과 죽음까지도 사랑해버리게 하는 성령을 거부하게 되겠지요.
오늘 독서의 말씀에 적용하면 악마와 같고 원수 같은 사람은 거부하고
나에게 ‘좋다’, ‘예쁘다’하는 사람만 만나고 심지어는 패당을 짓는 거지요.
세상을 위해 나를 내어주게 하고 수난을 감수케 하는
보편적 사랑과 수난의 성령을 거부하면 그럴 수밖에 없다고
코린토 신자들에게 말씀하시는 바오로 사도는
오늘 우리에게도 같은 말씀을 하시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