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
오늘 비유에서 다섯과 두 달란트를 받고 그것을 가지고
두 배의 이득을 거둔 종들은 착하고 성실한 종이라고 칭찬을 한 반면에
한 달란트를 그대로 뒀다가 한 달란트 그대로 주인에게 돌려드린 종은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주인은 꾸짖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단순한 선악 개념에서 보면
악한 짓을 하지 않고 단지 돈을 더 벌지 않은/못한 것뿐인데
왜 악하다고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선악의 기준이 이익을 내느냐 그렇지 않느냐 그것인가?
아니면 이익이 아니라 성실성의 문제 다시 말해서
애썼지만 벌지 못해 한 달란트 도로 돌려드렸다면
괜찮을 텐데 돈을 벌려고 들지 않은 것의 문제인가?
오늘 비유에서 주님께서는 분명히 그런 투로 말씀하십니다.
돈을 빌려줘서라도 그러니까 어떻게 해서라도
돈을 벌려고 애썼어야 하지 않았느냐고 하시니 말입니다.
여기에는 모든 선의 주인이신 하느님의 선을 가지고
선을 이루지 못하면 그것이 악이라는 논리가 있으며
이런 논리에서 악하다고 한 측면이 분명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 말고도 그 종이 악한 이유가 있습니다.
왜냐면 애쓰지 않은 것, 성실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게으른 종이라는 표현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다른 이유란 무엇이겠습니까?
제 생각에 그것은 선한 주인을 악하게 본 것입니다.
악랄한 주인으로 종은 보고 있고
그렇게 보는 것에 대해 주인은 분노하지 않습니까?
좋은 사람을 나쁜 사람이라고 하는 사람이 나쁜 사람이듯
사실 선을 악으로 보는 것이 악입니다.
악하지 않으면 선을 악으로 볼 리가 없고
선 자체이시고 원천이신 하느님을 악한 분으로 볼 리는 더더욱 없습니다.
그러니까 돈을 못 벌어온 종은 게으른 종에 불과하지만
최고선이신 하느님을 나쁘다 하는 종은 악할 뿐 아니라 최악의 존재입니다.
그런데 오늘 비유에서 종은 또한 쓸모없는 종입니다.
“저 쓸모없는 종은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그런데 어떤 사람이 하느님 나라에 쓸모없는 종입니까?
오늘 달란트 비유에서 달란트를 각기 달리 받는데
달란트를 많이 받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쓸모 있는 종입니까?
세상에서는 달란트가 많은 사람이 쓸모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에서는 그럴 리가 없고
그럴 리가 없는 이유는 달란트를 하느님께서 주시기 때문이며,
당신이 달란트를 조금 주시고 쓸모없다고 하시면 당신의 모순이지요.
오늘 코린토서에 의하면 하느님의 부르심과 선택을 받는 사람은
이 세상과 달리 지혜가 없고, 약하고, 힘이 없으며, 비천한 사람인데
이들은 하느님 앞에서 자기 능력을 자랑하지 않을 사람들이기에
부르심과 선택을 받은 사람들이고 그럼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하느님 앞에서 자기 능력을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리하여 어떠한 인간도 하느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나는 달란트가 별로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우리 중에 있다면
그런 우리를 당신 나라에서 쓸모 있는 종이 되게 하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오늘이 되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