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사랑을 않는 사람>과 <사랑을 못하는 사람>
우리는 사랑을 하지 않는 사람과 못하는 사람을 같다고 생각하거나
별로 그 차이를 생각지 않고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을 하지 않고 있는 것도 사랑치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둘은 분명히 다른 것이고
사랑치 못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용서하셔도
사랑하지 않는 것은 하느님께서 용서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사랑치 못하는 것이나 사랑하지 않는 것이나
사랑이 대상인 누군가에게 전달되지 못하는 면에서는 같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치 못하는 사람은 사랑을 하려고 하나 사랑을 못하는 것,
곧 사랑의 능력의 결핍이지만
사랑을 하지 않는 사람은 아예 사랑을 하려고 하지 않아 안 하는 것,
곧 사랑의 의지의 결핍입니다.
예를 들어 사랑치 못하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에게 100만 원을 주고 싶은데
돈이 한 푼도 없어서 주지 못하는 사람과 같고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돈이 100억이나 있는데도
100만원이 필요한 가난한 사람에게 단돈 100원도 안 주는 사람과 같습니다.
저는 요즘 사람들을 보면서 혼란스러울 때가 있고,
마음이 너무 아플 때가 많습니다.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노인이나 불편한 사람이 탔는데
건강한 사람이 자리를 양보해주지 않습니다.
옛날에는 당연히 일어나서 자리를 양보해주었고,
10여 년 전만 해도 잠자는 척이라도 하였는데
지금은 휴대전화로 뭘 하면서도 양보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이럴 때 내가 어떻게 해야 하나?
자리를 양보해드리라고 내가 나서야 하나?
어떻게 이렇게 양보라는 작은 사랑조차 없을까?
어떻게 이렇게 사랑 의식이 없고 사랑 의지가 없을까?
무엇이 이 사랑 의식조차 없게 하고 사랑 의지를 없앴을까?
몇몇만의 문제일까, 사회전반적인 현상일까?
무엇 때문일까? 가정교육문제일까, 학교교육문제일까? 우리종교의 문제일까?
제 생각에 어디 한 곳의 문제가 아니라 모두의 문제이고,
모두가 문제라면 이 시대의 문제이고, 우리사회의 문제입니다.
말할 것도 없이 자본주의의 문제, 그것도 신자유주의의 문제입니다.
사랑을 가르치지 않고 경쟁을 가르치며
희생을 가르치지 않고 이익을 가르치며
져주는 것을 가르치지 않고 이기는 법만 가르치며
공동체의 성취를 가르치지 않고 개인의 성취만 가르치는
자본주의의 체제와 논리와 문화가 우리 사회를 압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종교는 힘이 없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모든 종교의 가르침도 힘이 없으며
그러니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오늘 주님의 가르침은 더더욱 미친 소리입니다.
그런데 정말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입니까?
패배주의적으로 있어야만 하고, 있어도 되는 것입니까?
너희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완전한 자 되고, 완전한 사랑을 하라고
도전하시는데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우리는 포기할 것입니까?
엄청난 도전을 하시는 오늘 우리의 주님이십니다.